- ‘밤에 피는 꽃’ 연선이 그리고 배우 박세현의 이야기 [D:인터뷰]
- 출처:데일리안|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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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금토극 ‘밤에 피는 꽃’은 여러 기록과 배우들의 족적을 남겼지만,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결과물은 ‘배우 박세현의 발견’이다. 드라마 제작발표회 당시 이하늬와 제작진이 “박세현은 연기 신동이다”라며 주목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연선 역을 맡은 박세현은 드라마 방영 내내 증명했다. 그동안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밤에 피는 꽃’은 박세현을 ‘화제의 중심’에 서게 했다. 주위 반응 역시 확연히 달라졌다.
“어른들이 진짜 좋아하시더라고요. 저희 할머니도 오늘 아침에 ‘재방송 본다. 연선이 파이팅’이라고 연락이 또 왔어요. 제 친구들 대상으로 했을 때는 ‘이 드라마가 이렇게 시청률이 잘 나오는 드라마구나’라는 정도로, (인기가) 실감 되지 않았고, 드라마 시청률이 10% 넘는다고 해서 제 인생이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고, ‘그냥 그렇구나’라고 지냈는데,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부모님이나 할머니, 그리고 주변의 어떤 반응이 달라졌어요. 제가 자주 가는 카페에서도 알아보시는 분들이 생기면서 ‘진짜 많이 보는 드라마구나’라는 것이 종영한 후 확 느껴졌죠.”
‘밤에 피는 꽃’에 등장한 배우들은 각자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이하늬는 자신이 늘 보여주는 캐릭터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켰고, 김상중은 나름의 변화를 보이며, ‘빌런’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국민 엄마’ 김미경은 특유의 모성애를 다양하게 보여줬고, 이종우와 이기우도 자신들이 보여줄 수 있는 범위의 연기를 했다. 그러나 앞서 제작진이 ‘연기 신동’이라 칭찬한 박세현은 그간 보여줬던 연기와 확연히 달랐다.
“‘연기 신동’까지 극찬을 받을 정도는 아니고요. 그냥 저에게 주어진 몫을 하면서 ‘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인 것 같아요. (이하늬) 언니도 그렇고, 선배님들이나 감독님도 저를 워낙 예뻐해 주시고, 제작발표회에서도 그렇게 얘기해주셔서 어쨌든 저에 대해 한 번 더 사람들이 관심 가져주신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스스로에게 칭찬과 평가가 박한 편이라, ‘폐 끼치지 않고 할 도리는 했다’라는 게 어떻게 보면 저 스스로에게 해 준 제일 큰 칭찬인 것 같아요.”
박세현은 극 중 엄청난 ‘케미’를 보였던 이하늬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진다. 선배 배우로서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연기 멘토가 아니라 인생 멘토인 셈이다.
“모든 선배님들이 대사나 카메라 위치나 이런 것에 있어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하늬 언니가 유독 저를 많이 챙겨주셨죠. 제가 하늬 언니에게 더 애착을 갖게 된 이유가 ‘사람 박세현’을 너무 챙겨주셨어요. 어떻게 해야 제가 건강하게 연기를 할 수 있고,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 혹은 앞으로 작가님들에게 어떻게 연락을 드려야 하는지 사소한 부분까지 알려주셨죠. 제가 배우를 하면서 일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무겁지 않고 다정하게 가르쳐 주셨죠. 막 각 잡고 ‘너 여기 앉아봐’ ‘이 소리를 들어봐’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너는 좀 많이 예민한 편이야. 그런 예민함을 너는 어떻게 다뤄? 언니는 이랬어’라는 식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제가 어떻게 어떤 배우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성장했으면 좋겠는지를 이야기해 주셨죠.”
박세현은 이하늬와의 ‘여여 케미’ 뿐 아니라 좌부승지 박윤학 역을 맡은 이기우와도 ‘남여 케미’를 동시에 완성 시켰다. 특히 이기우와 관계는 팬들로부터 ‘훅 지나가 버린 1년의 과정을 스핀오프로 만들자’라는 말도 나왔다. 이하늬가 도성을 떠나고 결말로 가는 과정에서 이 둘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저희도 사실 그 부분이 아쉬웠죠. 드라마에서 둘의 관계가 서로 걱정하고, 약간 미묘한 ‘신경 쓰임’까지는 갔는데, 그 이후 갑자기 청혼하자고 하니 생뚱맞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 둘이 여화와 수호처럼 어느 정도 절절한 그런 마음의 오간 것이 아니라, 그냥 항상 뒤에서 ‘조심하십시오’ ‘조심하거라’ 이 정도였는데, 마지막 회에서 갑자기 예쁜 옷 입고 데이트하더니 ‘우리 집은 어떻느냐’ 이렇게 하니까, 저희도 그 부분은 뭔가 더 우리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죠. ‘12부작이라 아쉽긴 하다’라는 얘기를 배우들끼리도 좀 했어요.”
이런 ‘연기 신동’ 박세현이 어디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은 아니다. 2018년 OCN ‘신의 퀴즈 : 리부트’에서 친구를 괴롭히는 부모 배경 좋은 일진들을 몰아세우다가 학교 옥상에서 떨어져 혼수상태에 빠진 여고생 역할을 할 때부터 남달랐다. 한 에피소드 내의 연기였지만, 데뷔작이라 하기엔 눈에 확 띄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당시 연기가 후회스럽다고 말한다.
“그때가 21살이었어요. 오디션을 봤는데, 저는 진짜 운이 좋았죠. 당시 에피소드 주인공들도 많았던 상황에서 저도 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끌고 가면서, 데뷔인데도 서사가 있는 역할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그거 찍고 엄청 속상했어요. 제가 약간 거만했었던 거죠. 제가 어릴 때부터 연기를 조금 했었고, 고등학교 때도 성실하고 연습 잘해서 선생님들한테 칭찬 많이 받았고, ‘연기 좀 잘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죠. 사실 진짜 잘하는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저는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던 그런 욕심이 있었던 거죠. 대학교에 진학해 제가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데뷔했고, 그냥 여학생1,2가 아니라 이지은이라는 이름이 있는 캐릭터를 하게 됐으니까, 저는 제가 굉장히 잘할 줄 알았나 봐요. 그런데 너무 못하는 거예요. 제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는 게 하나도 없고, 그래서 그때 좀 뭔가 확 왔었나 봐요. 자존감이 훅 깎였죠. 그 이후 오랫동안 회복이 안됐고, 사실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는데, 회복된 척 하면서 다니는 거죠.”
의외였다. 당시 같이 출연한 또래의 배우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고, 데뷔 연기치고는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피소드 중 일부인 작품 하나가 오랜 시간 박세현의 트라우마로 남는다는 것이 의아했다.
“그냥 제 스스로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구나’라는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생각이 많은 편인데, 그런 ‘불안의 씨앗’이 한번 확 박히면 걷잡을 수 없어요. 이후에 여러 작품을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그 씨앗이 점점 커졌죠. 제가 잘하는 배우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늘 뭔가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심했죠. 이것이 바뀌게 된 터닝포인트가 ‘밤에 피는 꽃’ 전에 찍은 작품이 있는데, 감독님이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너는 이미 그 친구(캐릭터)다. 그냥 와서 만들자’라고 하셨는데, ‘정말 이렇게 가도 돼’라고 현장에 갔는데, 연기가 되는 거예요. 심지어 제 예상보다 더 좋은 것들이 좀 나오면서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한 흥미를 느꼈고, 그때쯤 ‘밤에 피는 꽃’을 만났죠. 이 작품은 대본도 워낙 좋았지만, 현장에서 만들어 가는 게 많았어요. 선배님들도 ‘어디 한번 해봐라. 내가 다 받아주마’라고 얘기해 주셨고, 그 분들이 기반을 단단하게 딱 잡아주시니까, 어떤 것이든 다 해도 될 것 같은 거예요. 원래 불안에 싸여서 현장을 갔는데, ‘밤에 피는 꽃’을 하면서는 현장이 너무 재밌다는 것을 알았죠. ‘오늘 가면 뭐 하지,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것들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기대하게 되더라고요.”
‘밤에 피는 꽃’으로 대중들에게 제대로 이름을 알렸지만, 박세현이 출연한 작품은 만만치 않다. ‘82년생 김지영’에서 정유미 아역,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모교’에서 김서형 아역, ‘길복순’에서는 전도연 아역을 맡았다. 또 ‘언어의 온도’ ‘오월의 청춘’ ‘제8요일의 밤’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리멤버‘ 등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쳤다. 작품만 놓고 보면 스펙트럼이 꽤 넓다.
“오디션이 확정되면 그 역할이 저에게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나이대가 맞든 안 맞든 일단 갔어요. 그리고 붙은 모든 역할을 했죠. 그래서 한 번에 3~4개 작품을 한 적도 많아요. 저를 갈아 넣은 거죠. 아무래도 신인이니까요. 제 단점이 인물을 굉장히 납작하게 봐요. 캐릭터가 생동감이 있으려면 폭도 커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죠. 예를 들어 무서운 악역인 의사도 집에 가면 다정한 아빠일 수 있고, 카페에 가면 친절한 고객일 수 있는 건데, 그런 것에 대한 이해도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짧고 납작하게 표현해도 연기를 잘한다고 보일 수 있는 역할에 제가 많이 합격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에너지를 한 번에 확 소진시키고 올 수 있는 역할들을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연기를 하면 ’내가 연기를 했다‘라는 감각이 있어요. 조금 세게 말하면 수명 깎아가면서 연기했던 것 같아요. 이게 어느 순간 멈춰야 하는데, 그 순간 ’내가 배우로서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 열심히 하는 배우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쉬지 않고 달린 거죠.”
그래서일까. 데뷔 후 짧은 시간임에도 단역이든 조연이든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본인은 캐릭터를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캐스팅하는 입장에서는 ’무엇‘인가가 있으니까, 꾸준히 배우 박세현을 찾은 것은 아닐까. 그런데 또 여기서도 의외의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그건 있어요. 제가 진짜 많이 죽었거든요. 제가 일단 목을 네 번 매달아봤고, (떨어져야 하기에) 와이어도 많이 타봤죠. 추락사도 해보고, 악귀에 씌어서 죽기도 하고요. 단언컨대, 제 또래 여자 배우 중에 제가 가장 다양하고 많이 죽어본 사람일 거예요. 한때 제 희망이 작품에서 안 죽고 끝까지 나오는 거였죠. 아마 제작진이 보기에 ’뭔가 쟤는 많이 죽어봤다. 그래서 잘 죽는데, 거기에 앳된 외모가 합쳐지면 시청자들이 보기에 충격이 생기는 동요가 확 줄지 않을까‘라고 여기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지금은 제가 나름의 ’극 중 죽음‘에 대해 나름의 기준이 생겼어요. 내 죽음이 사건화되거나 소재화가 되거나 도구화가 되는 역할은 그만하는 것으로요. 그렇게 기준을 정한 이후에는 ’그렇게‘ 죽은 적은 없습니다.”
’죽는 역할‘에 대해, 그리고 그 기준에 대한 이야기지만, 어떤 연기에 대해 마냥 열심히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셈이다. 모든 연기자는 ’기억에 남는 연기‘를 하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기억에 남는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기를 하다보면 이를 깨닫는 순간이 생긴다.
“온 힘을 다해 죽어도 알아봐 주지 않으시더라고요. 대중문화 예술을 하는 사람이 뭘 보여주고 나서 관심을 받아야 다음 작품으로 갈 수 있잖아요. 저는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고 열심히 몇 번이고 죽었는데, 아무도 절 기억 못하시더라고요. 사실 당연한 거죠. 그때는 아직도 ’천재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세현이‘가 뭔가 임팩트 있게 죽으면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을 궁금해하고 내 연기를 궁금해 주지 않을까라는 치기 어린 희망이 있었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순간 많이 힘들었죠. 21살 때부터 저는 미팅이나 오디션이 잡힐까봐 여행 한번 제대로 못 가고, 취미도 못 가졌거든요. 내가 놀다가 그 기회를 놓치고 작품을 못 한다는 것이, 제 스스로 용납이 안 됐어요. 그리고 저는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 배우라는 것을 알았죠. 그러니까 그 노력조차 안 하고 연기를 하겠다는 것이 저에게 용납이 안 됐죠. 그렇게 3~4년을 달렸는데, 어느 순간 인터넷에서 박세현을 검색해 보니,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예요. 당연하지만, ’나는 그럼 뭐 한 거지?‘ ’그동안 항상 진심을 다했고, 잘하진 못했어도 최선을 다했는데 남는 게 없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번아웃‘이 ’팍‘하고 왔죠. 많이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이런 어려움을 겪은 박세현의 모습은 종종 작품의 캐릭터와 잘 어울리기도 했다. 영화 ’리멤버‘에서 이성민(한필주 역)의 어린 시절 누이인 옥선으로 나와 위안부로 끌려갔다 온 이후의 연기는 짧은 등장이었지만 강렬했다.
“제 친구들도 그거 보고 ’너 나라 몇 번 뺏겨본 것 같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원래 캐릭터의 슬픔을 연기할 때 열정적으로 했는데, 어느 순간 텅 비게 슬픔을 연기할 줄 알게 된 거예요. 의도한 바는 아닌데, 옥선이를 보면 정신이 다 나가 있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필주라는 어떤 자극이 들어오니까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연기를 했는데, 저한테 그것이 마지막 신호였던 것 같아요. 슬픔을 연구하지 않았음에도 텅 비어감을 어린 나이에 느꼈다는 건 저를 많이 소진했다는 거잖아요. 제가 가진 에너지통이 이만큼인데, 저는 매일 마이너스로 만들어 쓰고 살기 때문에 어느 순간 그런 상태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그동안 많은 작품에서 죽음을, 슬픔을 연기했고, 번아웃과 ’현타‘를 많이 겪은 박세현에게 연선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밤에 피는 꽃‘은 ’배우 박세현‘을 새롭게 탄생시킨 작품이 됐다. 모든 배우가 자신이 출연한 작품이 잘 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인지도가 올라가길 원하지만 진실로 감사함을 느끼긴 쉽지 않다.
“사실 드라마가 잘됐지만 이것이 저한테까지 관심이 온다는 기대는 안 했어요. 4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캐릭터가 관심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지가 되는 것과 ’인간 박세현‘이 인지됨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래서 연선이가 사랑받고, 여화와 연선의 케미가 사랑받을 때도 그냥 ’내가 연선이를 폐 끼치지 않을 정도로 잘 연기했구나‘라고만 생각했죠. 이런 좋은 기운을 받고 이하늬라는 사람을 만나서 내가 마음 챙기는 방법을 배웠고, ’만약 다음에 좀 어두운 역할을 하게 된다면 이전과 다른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겠구나‘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른 분들이 연선이 너머에 있는 저를 궁금해하고, 이 배우가 과거에 어떤 작품을 했는지 궁금해하고, 제 얘기를 들어주려 하시는 거예요. 제 인생에 이런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이미 약간 단념하고 있었어요. 역시 ’꿈은 간절하지 않은 순간 이뤄진다‘고 드라마의 인기가 어떻게 나한테까지 왔는지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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