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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청용, 구자철은 지금도 대표팀과 함께 한다
- 출처:서호정 칼럼|201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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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대회와 상대팀의 수준은 다르지만 이번 2015 AFC 아시안컵에서 대표팀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지난 브리질월드컵 직후의 한국 축구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기쁨과 감동으로 돌려놓고 있다. 대표팀은 한국 축구의 상징이자 그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태극전사라는 단어에 담긴 이미지였던 포기를 모르는 투혼, 강력한 압박과 많은 활동량을 그라운드 위에서 잘 보여줬다. 그 결과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조별리그와 토너먼트까지 5전 전승 7득점 무실점을 기록했고, 27년 만에 결승에 진출해 있다. 무엇이 월드컵에서 무릎 끓은 채 좌절했던 한국을 7개월 만에 아시아의 호랑이로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일까?
자존감과 오기, 다신 지지 않는다
이번 대회에서 선수들이 유달리 강조하는 것은 ‘자존심과 책임감’이다. 특히 지난 월드컵을 다녀 온 선수들은 경기 전후 인터뷰에서 이 단어를 빠트리지 않는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가장 처참한 성적표를 갖고 브라질에서 돌아왔던 그들은 국민과 팬들의 분노를 여과 없이 경험했다. 고개를 숙인 채 들어 온 공항에서는 엿 세례와 야유를 받아야 했다. 일부 몰지각한 팬의 행동이었지만 그 뒤 여러 공간에서 피부로 느낀 타인의 시선엔 날이 서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들에게 아시안컵은 명예 회복을 위한 기회이자 스스로의 자존감을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주장 기성용은 이라크와의 4강전이 끝난 뒤 “우리가 이 대회에서 우승해야 하는 첫번째 이유는 우리의 자존심을 위해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월드컵에서의 부진과 최근 아시아권 팀들과의 경기에서도 확실히 압도하지 못하는 모습이 이어지자 아시안컵의 상대들은 한국을 얕보는 모습도 보였다. 조별리그 당시 호주의 포스테코글루 감독과 중국의 알랭 페랭 감독은 한국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런 모습들은 선수단에 고스란히 전해줘서 오기를 자극했고 결국 한국은 호주를 꺾고 조 1위로 8강에 오르며 결승까지 순항했다. 호주와의 결승전을 앞두고도 선수들의 자존감과 오기를 적절한 밸런스를 이루며 결연한 팀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당시 팀 케이힐을 선발에서 제외하는 등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며 한국전에 자신감을 보인 데 대해 기성용은 “우리도 전력을 다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라며 맞받아쳤다. 곽태휘는 “(빠진) 걔들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라고… 선수 몇 명 바뀐다고 그들 플레이가 확 달라지지 않는다”며 일갈을 날렸다.
다신 지지 않겠다는, 월드컵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선수들의 마음가짐은 이번 대회에서 한국의 경기력이 완벽하고 깔끔하지 않음에도 무실점으로 연승을 거두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상대에게 기회를 내주지만 문전에서 놀라운 집중력으로 위기를 넘기고 반격을 가해 골을 넣는 패턴이 이번 대회 한국의 주된 경기 흐름이다.
열정과 믿음의 슈틸리케 감독
이런 한국의 상황에서 열정과 믿음으로 무장한 슈틸리케 감독의 취임은 절묘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선수로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지만 지도자로서는 성인 무대에서 우승 커리어가 없는 슈틸리케 감독은 취임 당시 절반의 의심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월드컵 실패 후 선수들 스스로가 동기부여로 무장한 상황에서 강한 열정으로 그들을 뒷받침하고 배려와 믿음으로 기를 불어넣어주는 슈틸리케 감독의 존재는 절묘하게 아귀가 맞았다. 그는 취임 당시 첫 미팅에서 선수들에게 자신의 현역 시절 영상을 보여줬다. 선수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의 인생을 보여줌으로써 서로가 코드를 맞추고 신뢰할 수 있길 바랐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모든 훈련을 지휘하면서도 토너먼트에 들어서는 상대 분석을 위해 캔버라와 뉴캐슬을 다녀왔다. 이번 대회에서 선수단장을 맡고 있는 유대우 축구협회 부회장은 “축구에 대한 순수함과 열정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하다”고 평가를 했다.
팀과 선수들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다. 그는 선수들을 자식처럼 여긴다. 그 동안 대표팀에 선발된 선수들은 하나같이 “감독님의 배려와 믿음이 크다”라고 입을 모았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선수들 위에 군림하고, 기능을 최대치로 뽑아내기보다는 충분히 이해시켜 선수들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을 100% 쏟아내게 만드는 타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부진하거나 외부의 압박에 흔들리는 선수들을 지키는 것도 눈에 띈다. 선수에 대한 비판은 절대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있다. 구자철의 경우 대회 직전 평가전에서의 부진으로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그러나 오만과의 1차전에서 슈틸리케 감독은 남태희가 아닌 구자철을 선발로 내세웠다. 구자철은 그 경기에서 MOM으로 뽑히며 팀 승리에 기여해 그 믿음에 보답했다. 손흥민 역시 감기몸살과 부진으로 조별리그에서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지만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에 선발 투입돼 2골을 넣으며 제 몫을 해냈다. 슈틸리케 감독은 손흥민을 끝까지 교체시키지 않았고 그것이 적중했다.
‘군데렐라’ 이정협은 슈틸리케 감독의 선수 보는 눈과 믿음의 축구의 결정판이다. K리그에서도 대단치 않았던 그의 장점을 확인하고는 과감히 대표팀에 선발해 아시안컵까지 데려왔다. 이정협은 대회에서 2골 1도움을 포함 대표팀 승선 후 A매치 6경기에서 3골 1도움을 기록 중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대회 개막을 앞두고 시드니에서 이정협과 면담을 가지며 “잘하든, 못하든 책임은 내가 진다. 너는 할 것만 해라”며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슈틸리케 감독은 매 경기마다 선수들이 입장을 할 때 출입통로에서 기다리다 걸어 나오는 선발라인업 11명과 차례로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자신이 믿음을 갖고 선발로 내세운 선수들과 손뼉을 치고 체온을 느끼며 ‘우리는 하나’임을 확인시켜주는 그만의 의식인 것이다.
성숙해진 기성용, 모두에게 귀 기울이는 주장
기성용의 역할도 이번 대회 성공을 논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다. 한명의 선수로서 그라운드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기성용은 이번 대회 최우수선수(MVP) 후보로 꼽힌다. 한국이 우승을 거둘 경우 확실시된다. 이미 월드컵 당시에도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세계적인 선수들과 대등한 레벨을 보여준 그는 소속팀에서 꾸준히 기량을 끌어올렸고 아시아 무대에서는 경쟁 상대가 없음을 증명했다. 자바드 네쿠남과 엔도 야스히토가 이번 대회에서 노쇠화한 모습을 보이면서 당분간 아시아를 대표하는 중앙 미드필더는 기성용이 차지가 될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기성용은 주장이라는 역할도 맡았다. 지난 10월 처음으로 A대표팀 주장이 된 기성용은 구자철, 이청용 등을 놓고 고심하던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을 받았다. 지난 2013년 SNS 사태로 국가대표에 대한 마음가짐에 의심을 받기도 했던 기성용이지만 이번 대회에서 주장 역할을 100% 소화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내면적 성숙이다. 지난 2년 사이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과 SNS 사태로 여론의 몰매를 맞는 과정에서 오히려 성장했다. 월드컵 이후 대표팀의 명예 회복에 대해서도 가장 큰 의욕을 보였던 것이 기성용이었다. 그는 월드컵 후 일찌감치 아시안컵을 겨냥하며 “반드시 우승을 해야 한다”며 목표의식을 나타냈다.
대표팀 내부의 목소리에 의하면 기성용은 민주적인 리더다. 조준헌 홍보팀장은 “성용이는 한국 축구가 지금까지 봐 온 전형적인 리더는 아니다. 강한 리더십보다는 민주적인 절차로 모두의 의견을 모아서 감독에게 전달하는 타입이다”라고 전했다. 주장이 된 뒤 기성용은 식사 때마다 테이블을 달리 한다. 이전에는 구자철, 이청용 등 친한 동료들과 자리를 가졌지만 지금은 일부러 다른 동료들 틈에 끼여 식사를 한다. 그 자리에서 선수들이 가진 생각을 듣는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의견들을 슈틸리케 감독과의 면담 때 전달하는 방식이다. 선배인 곽태휘는 “지금 대표팀에서 딱 중간나이인데 가교 역할을 잘하고 있다. 결혼 후 많이 성숙했고 주장이 된 뒤 생각과 행동 모두 책임감 넘친다”고 평가했다.
대표팀의 최고참인 차두리와 곽태휘는 그런 기성용을 뒷받침해준다. 차두리는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과 행동으로 대표팀에서도 해피 바이러스로 통한다. 곽태휘는 과묵한 성격이지만 훈련과 경기 때 그라운드 위에서 강인한 책임감을 보여준다. 이 온수와 냉수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기성용이 처음 맡는 큰 대회에서의 주장 역할을 부담 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됐다. 지난 월드컵에서 고참의 부재가 어떤 불상사로 이어지는 지 확인했던 터라 차두리와 곽태휘의 역할은 더 없이 중요하다.
청용•자철은 팀을 위해, 팀은 청용•자철을 위해
이번 대표팀은 하나가 된 팀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모두가 주연이고 모두가 조연이다’라는 생각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훈련장에선 경쟁하지만 경기장에선 응원한다. 이번 대회를 통해 빛나고 있는 골키퍼 김진현은 김승규, 정성룡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주전을 차지하며 그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나친 포지션 경쟁심이나 선수들 간의 갈등, 소통의 어려움으로 팀 케미스트리가 무너지는 일이 없다. 슈틸리케 감독은 5경기를 치르는 동안 23명의 선수들 중 22명을 경기에 출전시켰다. 그렇게 나간 선수들은 그때마다 제 몫을 해냈다. 유일하게 경기에 나서지 못한 선수는 3번 골키퍼인 정성룡이다. 하지만 그 정성룡마저도 팀 자체 연습 경기와 훈련 때마다 최선을 다하며 골키퍼의 리더이자 선수단 전체의 중고참으로서의 몫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현재 대표팀이 얼마나 좋은 분위기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부상으로 중도에 떠난 이청용과 구자철의 역할이다. 두 선수는 일찌감치 대회를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단 전체와 함께 소통하고 있다. 대표팀 일정 등을 공지하는 모바일 메신저 내 단체채팅방에 여전히 남아 타지에서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일정 공지를 위해 단체채팅방에 들어가 있는 유일한 비(非)선수인 박일기 팀 매니저는 “청용이와 자철이 둘 때문에 매일 채팅방이 시끄럽다”고 말한다. 기성용은 “둘이서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에게 많은 힘과 응원을 준다”며 어떤 분위기인지 소개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직전 부상으로 낙마했던 곽태휘는 두 선수의 그런 모습을 보는 심정이 짠하다. 그는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얼마나 본인들이 힘들 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도 청용이와 자철이가 일부러 선수들 모두 웃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아무래도 경기 전에는 선수들이 경직될 수 있는데 둘이서 그런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대견하다”고 말했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대표팀 선수들은 지금 빠져 있는 두 선수를 위해서 우승하고 싶다는 바람도 밝혔다. 슈틸리케 감독은 팀에 융화될 수 없다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뽑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이 팀의 일원이라는 책임감과 긍지를 갖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하는 이청용, 구자철은 슈틸리케 감독이 바라던 구성원의 모습이다. 지난 브라질월드컵 당시 독일대표팀은 결승전 당시 발목 부상으로 최종명단에서 안타깝게 제외됐던 마르코 로이스의 21번 유니폼을 벤치에 걸었다. 우승을 확정한 뒤에는 그 유니폼을 들고 다니며 기쁨을 나눴다. 우리도 독일 대표팀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대표팀을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이청용과 구자철의 유니폼을 걸 수 있을까? 이번 대표팀이 자존감과 긍지, 동료애로 똘똘 뭉친 팀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길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