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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틸리 감독, 우승 남겼지만 존중 부족했던 승부사
- 출처:오마이뉴스|2021-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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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새로운 시도 눈길 끌어... 아름답지 못했던 마무리
로베르토 산틸리 감독이 이끄는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가 2020-21시즌 프로배구 통합 챔피언의 주인공이 됐다. 대한항공은 17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막을 내린 V리그 남자부 챔피언결정 5차전에서 우리카드를 세트 스코어 3-1(24-26 28-26 27-25 25-17)로 꺾고 5전 3선승제의 시리즈에 마침표를 찍었다. 대한항공 정지석은 챔프전 MVP에 올랐다.
대한항공은 올 시즌 전까지 정규시즌 우승 세 차례, 챔피언결정전 우승 한 차례를 달성했지만, 통합 우승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5월 이탈리아 출신의 산틸리 감독을 영입한 것이 신의 한 수가 됐다. 대한항공은 물론 남자배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사령탑이었다. 대한항공은 선진 훈련시스템 접목과 유럽 배구의 기술을 습득하고, 선수단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산틸리 감독에 주목했다.
세터 출신의 산틸리 감독은 2002년 이탈리아 U21 대표팀을 맡아 U21 유럽선수권에서 금메달을 안겨 줬고, 다수의 프로팀과 국가대표팀 사령탑까지 역임한 베테랑 감독이었다. 그리고 한국무대에서 1년만에 대한항공의 첫 통합우승 사령탑이자, 외국인 최초의 우승 감독이라는 타이틀까지 동시에 거머쥐며 우승청부사다운 명성을 입증했다.
산틸리 감독은 원래 대한항공의 강점이던 안정된 수비력을 바탕으로 세터 한선수, 레프트 정지석과 곽승석 등 국가대표 트리오와 신예 임동혁 등 젊은 선수들의 조화를 이뤄내며 한층 탄탄한 조직력을 구축했다. 특히 산틸리 감독은 정규리그를 통해 주전과 벤치 구분 없이 다양한 선수들을 두루 기용하면서 외국인 선수와 스타플레이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한국식 ‘몰빵배구‘의 고정관념을 깼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지위, 임동혁, 조재영, 손현종, 오은열 등 젊은 선수들이 산틸리 감독의 신뢰 속에서 꾸준한 경험을 쌓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시즌 초 외국인 선수 안드레스 비예나의 부진과 장기부상 이탈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임동혁의 라이트 기용에 대성공을 거두며 대한항공이 줄곧 선두권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산틸리 감독의 노련한 경기운영 능력에 기댄 바 컸다. 대한항공은 1월부터 요스바니 에르난데스가 가세한 이후 6라운드에는 전승행진을 펼치며 결국 1위로 챔프전에 직행하는데 성공했다.
챔프전에서는 알렉스를 앞세운 우리카드의 반격에 1차전을 내주는 등 고전했으나, 산틸리 감독의 냉철한 경기운영에 힘입어 5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최후의 승자가 됐다. 승부처인 5차전 3세트에서 과감히 주전인 요스바니와 한선수를 동시에 빼고 교체멤버들을 투입하여 흐름을 바꾼 용병술은 백미였다. 상대적으로 30대 선수들이 더 많아 시리즈가 장기전이 될 경우 대한항공에 불리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산틸리 감독의 효과적인 로테이션에 힘입어 알렉스에 의존하며 선수층이 얇은 우리카드에 오히려 체력전에서 앞선 것이 대한항동 역전승의 또 다른 비결이었다.
외국인 감독으로서 불과 1년 만에 한국배구계에 많은 업적을 남긴 산틸리 감독이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시즌 내내 제기된 경기 매너와 동업자 의식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탈리아 출신답게 다혈질적인 성향의 산틸리 감독은 심판 판정에 대한 잦은 항의와 도를 넘어선 신경전으로 여러차례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 11월에는 한국전력과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들의 세리머니가 과도하다며 소리를 지르다가 장병철 한국전력 감독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카드와의 챔프 3차전에서는 상대 외국인 선수 알렉스와 트래쉬 토킹을 주고받기도 했다. 배구에서 상대팀 감독과 선수가 대놓고 마찰을 빚는 것은 보기드문 일이었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있어 상대와의 신체 접촉이 없는 배구라는 종목의 특성과 좁은 배구판 안에서 엄격한 선후배 관계로 엮여져 있는 한국스포츠 문화를 고려하면 산틸리 감독의 언행은 확실히 유별난 면이 강했다. 산틸리 감독도 우승 후 인터뷰에서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산틸리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 앞에서 좋은 팀을 만드는데 여러 가지 방법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자신의 방식으로 이뤄낸 성과에 큰 자부심을 드러냈다.
산틸리 감독의 스타일은 자신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팀을 보호하고,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철학에 가깝다. 필요하다면 과장되고 자극적인 언행과 쇼맨십도 마다하지 않는다.
산틸리 감독이 이룬 성과는 성과대로 존중되어야한다. 하지만 스포츠에는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내용도 중요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페어플레이 정신은 스포츠의 기본이다.
대한항공과 우리카드의 승부는 끝났지만 마무리는 아름답지 못했다. 신영철 우리카드 감독은 산틸리 감독과 경기 전 후 악수를 거부하며 끝나지 않은 앙금을 드러냈다. 신영철 감독은 악수를 거부한 이유에 대하여 "4차전 직전 알렉스가 산틸리 감독에게 인사를 하러 갔는데 ‘두고 보자‘고 했다더라. 설사 불편한 일이 있었더라도 인사하러 간 선수에게 그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며 산틸리 감독의 행동을 비판했다.
산틸리 감독은 이에 대하여 해명했다. 3차전 당시 알렉스와의 첫 충돌 상황도 "1세트 후 알렉스가 내게 먼저 이탈리아 말로 이야기를 걸어왔고 자연히 나도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알렉스는 대한항공 벤치에서 이전부터 계속 트래쉬토크를 시도해서 그만하라고 이야기했다는 입장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이런 대화는 경기 중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다음날 복도에서 알렉스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에게 나와 대화할 생각 말고 경기에서 네 플레이만 충실하라고 얘기한 게 전부"라며 특별한 내용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감독 생활을 하면서 어느 나라를 가든지 악수를 거절한 감독은 신영철 감독이 처음이다"라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서로의 입장과 해석은 미묘하게 다른만큼 이에 대한 최종 판단은 팬들의 몫이다. 하지만 승자와 패자가 끝까지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스포츠가 감정적인 싸움판으로 전락해버린 모양새 자체는 깊은 아쉬움을 남긴다.
대한항공과 1년 계약을 마친 산틸리 감독은 다시 유럽리그로 돌아갈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항공은 또다시 외국인 감독을 새롭게 영입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훗날 한국 배구역사는 산틸리 감독이 남긴 공과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