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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을 선택한 차붐, 이동국을 버린 히딩크
출처:스포츠동아|201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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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에 따라 웃고 운 이동국 19세때 첫 태극마크 ‘차범근의 신데렐라’ 한일월드컵 엔트리 제외…일생일대의 시련 38세 재승선…최장기간 A매치 출전 눈앞

신태용호 1기에 승선한 이동국(38전북)이 처음 태극마크를 단 때는 지금 대학교 1학년생들이 태어난 1998년이다. 그 해 5월16일 자메이카와 친선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 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동안 그는 태극마크를 ‘달았다 뗐다’를 반복했다.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고, 현역에서 여전히 경쟁력 있는 기량을 보여주고 있으니 늘 후보 자격을 부여받은 건 어쩌면 당연했다.

이동국이 8월 31일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 이란전에 출전할 경우 역대 최장기간 A매치 출전 1위 기록(19년 107일)을 세우게 된다. 현재 최장기간 1위는 이운재의 16년 159일이다. 이번 대표팀 명단 발표에서도 ‘대박이 아빠’이동국이 대박을 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펼쳐졌던 짠한 스토리 덕분이다. 월드컵과 관련된 그의 축구인생을 얘기하자만 책을 몇 권을 쓰도 모자랄 판이다. 98프랑스월드컵 이후 그의 축구인생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특히 대표팀 감독과는 어떤 인연으로 얽혀 있을까. 20년의 세월을 되돌아본다.



● 천당과 지옥
프랑스월드컵을 앞둔 한국대표팀 차범근 감독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투자를 했다. 이 때 눈에 들어온 유망주가 19세 이동국이었다.

차 감독은 타고난 재능뿐 아니라 신체적인 조건도 중요하게 여겼다. 이동국은 육상선수 출신으로 스피드와 유연성이 돋보였고, 185cm· 80kg의 당당한 체구에서 나오는 파워도 일품이었다. 차 감독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월드컵 본선 네덜란드전에 살짝 선보였을 뿐인데도 ‘신데렐라’가 됐다. 안정환, 고종수와 함께 K리그의 트로이카로 선풍을 일으켰다. 지금은 팬레터 문화가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 한 달 2만 통 이상의 팬레터가 쏟아졌고, 포항구단은 홈페이지에 이동국란을 따로 신설했다.

하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날개가 꺾였다. 엔트리에서 탈락한 것이다. 히딩크의 스타일과 맞지 않은 게 결정적이었다. 히딩크는 한국축구가 살아남기 위해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기동력과 압박을 강조했는데, 수비 가담능력이 부족했던 이동국은 어울리지 않았다.

낙심한 이동국은 2002월드컵 경기를 보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국축구를 통해 하나가 되었지만 이동국은 자포자기한 채 따로 놀았다. “거의 폐인같이 생활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이동국은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시 저는 팀플레이보다는 골만 넣으면 제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딩크 감독님은 그런 것에 용납을 안 하는 분이었다.” 그의 반성과 재기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 부상 악몽과 16강 우루과이전
동료들은 월드컵 4강 혜택으로 병역의무를 면제 받았지만 이동국은 2003년 상무에 입대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기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재기를 꿈꿨다. ‘게으른 천재’는 ‘투혼의 전사’로 그렇게 변해갔다.

네덜란드 출신의 외국인 지도자 본프레레 감독으로부터 눈도장을 받았고, 바통을 이어받은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에서도‘황태자’였다. 아드보카트는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명장이었다. 아드보카트는 이동국을 “천부적인 소질을 갖춘 선수”로 평가했다. 팀플레이에도 눈을 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2002년의 반성과 오기로 이를 악물었다. 2006년 4월까지는 순탄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이 외면했다. 본선을 앞두고 치른 평가전에서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인생은 그렇게 꼬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동국의 스토리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이 아니다. 허정무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010년, 또 한번 부상 때문에 눈물을 삼킬 뻔했다. 최종 명단 발표를 앞두고 벌어진 에콰도르와 평가전에서 오른쪽 허벅지 미세 근육이 파열된 것이다. 2006년처럼 십자인대는 아니었지만, 본선에서 뛸 수 있으냐 없느냐의 갈림길에서 애를 태웠다.

1999∼2000년에도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허 감독은 이동국의 사용설명서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기다렸다. 남아공으로 가기 전 전지훈련지 오스트리아에서 허 감독은 명단을 발표하면서 이동국을 택했다. 허 감독은 “대표팀에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12년 만에 본선 무대를 밟았다. 위험부담을 감수한 허 감독과 이동국은 그렇게 마음이 통했다.

그러나 선발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었다. 16강 우루과이전에 후반 40분경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살리지 못한 이동국은 팬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고개를 숙였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이동국의 이름은 애초부터 기대 밖이었다. 최종 예선의 지휘봉을 잡은 최강희 감독은 중용했지만, 본선을 1년 앞두고 소방수로 나선 홍명보 감독은 2012런던올림픽 동메달의 분위기를 이어가면서 젊은 선수들 위주로 팀을 꾸렸다.



● 신태용 감독과의 케미, 러시아를 관통할까
신태용 감독은 이동국 선발에 대해 “나이도 있지만, 최고 기량이 있다고 판단해 뽑았다”고 했다. 예상 밖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신 감독의 생각을 잘 보여준 장면이기도 했다.

나이, 경력 불문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구현해줄 선수를 선택한 것이다.

신 감독과는 악연이 먼저였다. 2008년 말 신 감독이 성남 지휘봉을 잡았을 때 팀 정비 차원에서 이동국을 내보냈다. 결국엔 최강희 감독의 전북으로 간 게 전화위복이 됐지만 미들즈브러와 성남에서의 잇따른 실패로 괴로운 시기를 보내던 이동국이 달가워할 리는 없었다.

신 감독은 냉정하지만은 않았다. 기회도 줬다. 2014년 9월 대표팀 임시 지휘봉을 잡은 베네수엘라와 우루과이와 친선전에 이동국을 선발했고, 이동국은 선수로서는 명예인 센추리 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38세 이동국의 월드컵 사연이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이동국이 신 감독과의 케미를 통해 본선행을 확정짓는 게 지상과제다. 나아가 내년 본선 무대를 밟아 골까지 넣는다면 화룡점정이 될 수 있다. 그게 이동국 월드컵 스토리의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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