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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가영 "고1때 유학, 죽기살기로 하니 세계 정상"
- 출처:매일경제|2017-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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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포켓볼 최초 ‘그랜드슬램’, 13년간 세계랭킹 10위권 유지, 연금 받는 유일한 여성 당구선수. ‘여자 포켓볼 전설’ 앨리슨 피셔가 인정한 “현존 최고의 여자선수” 김가영(인천시체육회·34)이다.
이런 그를 서울 강동구 ‘김가영 포켓볼 아카데미’에서 만났다. 김가영은 6일 2일 자신의 국토정중앙배 2관왕(개인전, 혼합복식) 보도 얘기를 먼저 꺼냈다.
“MK빌리어드뉴스 보도가 1년 6개월만의 국내 선수권대회 우승만큼 기뻤어요. 기사 보고 연락해오는 사람도 있고요. 아! 드디어 포켓볼도 언론의 주목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 동안에는 아무리 큰 대회에서 우승을 해도 언론이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제가 아는 기자한테 먼저 연락을 해야 조그맣게 소개해주는 정도였지요.”
혼합복식 우승은 파트너인 이완수 선수 공으로 돌렸다. “완수 오빠와는 국제대회 10개 이상 나갔는데, 한 번도 진적이 없어요. 제가 기가 센 편이잖아요. 하하. 그런데 완수 오빠가 잘 받아주며 완급을 조절해주니 경기가 잘 풀려요.”
▲“세계 최고 선수를 잡자...고1때 포켓강국 대만으로 건너가”
이날 기자가 만난 김가영은 미소가 많은 사람이었다. ‘센 언니’로 불리는 그의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시합 사진들이 많이 나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같다”고 그는 설명했다. 실제론 웃음 많고 밝은 성격이란다.
그의 강한 캐릭터는 대만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대만은 세계적인 포켓볼 강국이다. 김가영은 19세이던 2001년 대만으로 건너가 초반 어려움을 딛고 점차 파란을 일으켰다. 류신메이 등 당대 최정상급 선수들에게 기죽지 않고,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소마녀(小魔女)다. ‘독기있는 어린 여자아이’란 뜻이다. 이걸 한글로 풀어쓴 게 ‘작은마녀’다.
김가영은 “대만에서 이 별명 도움을 꽤 받았다. 상대 선수를 째려보면 위축되는 게 보였다”며 웃었다.
대만행은 고1때 우상 류신메이와의 시합이 계기가 됐다. “국내 9볼 시합에서 6:1로 이기다 6:7로 역전패했어요. 국내엔 적수가 없었는데 너무 분했어요. 류신메이와 같은 세계적인 선수를 잡기 위해선 그들이 활동하는 대만에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아버지 김용기 씨(67)는 흔쾌히 동의했다. 딸에겐 국내무대가 좁아보였다. 그리고 김가영은 1년 만에 이 믿음에 확실하게 보답했다.
오늘의 김가영을 있게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다. 대학 때 유도선수였다가 결혼 후 당구선수가 된 김용기 씨는 딸의 가능성을 믿고 적극 밀어줬다. 연습장은 본인이 운영하던 당구장이었다.
“아버지 당구장 가서 10살 때 처음 큐를 잡았어요. 중1때 이미 4구 500점을 치니, 동네에 적수가 없었어요. 세리(4구경기의 몰아치기)만 배우면 1000점, 2000점 칠 텐데, 그게 의미가 없겠더라고요.”
그러던 1996년, 그에게 아마추어 포켓볼대회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상금 40만원’이 끌렸다. 아버지 당구장엔 포켓테이블이 없어 다른 곳에서 2시간씩 이틀 연습했다. 그리고 덜컥 우승했다.
떡잎을 알아본 아버지는 딸을 선수로 키우기로 했다. 종목은 포켓볼.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고, 상금규모도 커져가는 추세였다. 당시 선수권대회 등 큰 대회 우승상금은 7000달러(현재 환율기준 약 786만원) 수준. 그 후 딸에게 웨이트트레이닝부터 정신자세, 연습방법 등 스포츠선수로가 갖춰야할 모든 걸 가르쳤다.
딸은 곧 ‘국내 최고선수’가 돼 보답했다. 포켓볼 선수로 등록한 1997년(14세) 다음해부터 계속 국내랭킹 1위에 올랐다.
10대 때부터 국내무대를 평정한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천재소녀’였다. 그러나 김가영은 동의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선수들은 대개 20대부터 본격적으로 당구를 치는데, 저는 10살 때부터 일찍 접해서 그 감을 일찍 알았을 뿐이에요. 어려서부터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세계 포켓볼 챔피언 김가영...그러나 현실은
대만을 접수한 ’작은마녀‘는 2003년 미국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당시 여자포켓볼 3대산맥은 류신메이, 앨리슨 피셔(영국), 카렌 코어(아일랜드)였습니다. 류신메이는 꺾었고, 남은 두 선수와 붙고 싶었죠. 그래서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2003년 20살에 아마추어 투어를 돌다 WPBA(미국여자프로당구협회) 라이센스를 획득했다. 그리고 미국진출 1년째인 2004년, 21살에 세계선수권(오스트리아) 우승컵을 들었다.
세계선수권 결승 상대는 류신메이였다. 김가영은 선수로서 맞이한 가장 큰 대회에서 우상까지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김가영은 오히려 이후 당구에 대한 의욕을 잃게 된다.
“포켓볼 선수로서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은 최고 목표였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면 언론의 관심도 받고 후원도 쏟아질 줄 알았죠. 그런데 현실은 너무 달랐어요. 우승상금이 7000달러인데, 대회 경비로 쓴 게 3000달러였어요. 언론의 관심은 전무했고, 후원도 없었어요.”
그렇게 재밌던 당구가 싫어졌다. 그러나 큐를 놓진 않았다. 오기가 생겼다. 한번이 부족하면 두 번 해내면 달라지겠지 하고. 결국 23살에 2006 대만 세계선수권까지 두 대회 연속 우승했다. (2005년 대회는 사스 발발로 취소).
그런데 이번엔 차유람이 ‘얼짱’으로 확 떴다.
세계선수권 2연패가 ‘얼짱 열풍’에 가려졌다. 4살 동생 차유람과 10번 붙어 한번 지면 그게 기사로 나갔다. 심지어 둘을 라이벌로 다룬 기사에 ‘김가영 한물갔다’는 댓글까지 달렸다.
김가영은 “선수는 실력과 내면이 가장 중요하다고 아버지께 평생 배웠고, 태어나 한 번도 외모에 불만가진 적이 없었다”며 “하지만 20대 초반 외모에 관심 많을 때 받은 상처는 꽤 아팠다”고 회상했다.
거울보기도 싫었다. 꼭 언론이 차유람 편 같았다. 실력과는 별개로 찾아온 온 슬럼프는 ‘의욕상실’까지 번졌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다. 고민 끝에 심리학 교수를 찾아 상담하고, 심리 관련 책들을 탐독했다.
“어느 순간 제 스스로 정신적으로 많이 부족한 선수란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나선 오히려 멘탈이 단단해진 걸 느꼈습니다. 게임만 집중하고, 경기 외적인 부분에 절대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했지요.” 그렇게 그는 ‘강철 멘탈’선수가 됐고, 지금은 당시 기억을 웃으면서 추억할 정도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