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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NBA 스타] 천재박명, 리그 최고의 득점기계 맥그레이디!
출처:점프볼|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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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박명(天才薄命).’, 슬램덩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말일 것이다. 본래의 뜻은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는 보통 기구한 운명이 많다”는 ‘의미의 미인박명(美人薄命)이지만 슬램덩크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천재는 코트를 빨리 떠난다”는 의미로 천재박명이란 새로운 단어를 슬램덩크에 사용했다.(*스크롤 압박이 심하니 사전에 양해를 구합니다) 

NBA는 농구의 본고장이자 세계농구의 중심으로 사실상 세계에서 농구를 가장 잘한다는 선수들이 모인 곳이다. 많은 팬들은 스타들의 화려한 플레이에 열광하고 혹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우승실패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다. 이렇게 NBA는 매 시즌 화려한 플레이와 이슈들로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 이면엔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과 뛰어난 재능들이 부상 등의 문제로 코트를 떠나는 참혹함 역시 존재한다.

기자는 최근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슈퍼스타와 올스타의 차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는 갑작스런 친구의 질문에 쉽게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누군가 기자에게 슈퍼스타와 올스타의 차이를 묻는다면 아래와 같이 답하고 싶다. 아래의 대답은 어디까지나 기자 개인의 생각이기에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자 주관적으로 올스타는 게임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선수라 한다면 슈퍼스타는 ‘게임뿐만 아니라 농구장 전체 관중까지 지배하는 선수’라 말하고 싶다. 그 예로 현재 NBA는 르브론 제임스, 제임스 하든 등 수많은 슈퍼스타들이 우승을 위해 쉼 없이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 뛰어난 기량을 가진 슈퍼스타들이라 할지라도 매 경기 팀을 승리로 이끌 순 없다. NBA 역사상 화려한 플레이로 코트를 지배했지만 NBA 우승 타이틀 하나 없이 쓸쓸히 커리어를 마감한 슈퍼스타들도 많이 있다.

기자는 그중 가장 안타까운 슈퍼스타로 바로 NBA 역사상 최고의 득점기계 중 한 명이었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37, 203cm)를 뽑고 싶다. 앞서 천재박명이란 단어로 글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천재박명이라는 말은 2000년대 NBA를 주름 잡던 득점기계였지만 부상으로 그 재능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했던 맥그레이디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티맥 타임, 동티맥 서코비, NBA 최고의 1on1 플레이어 등의 화려한 수식어들이 항상 이름 앞에 붙어다녔던 맥그레이디였다. 하지만 맥그레이디는 커리어 내내 NBA 플레이오프 2라운드 이상의 무대를 단 한 번 밟아봤던 비운의 슈퍼스타이기도 하다. 맥그레이디는 2013-2014시즌 샌안토니오 스퍼스 소속으로 NBA 파이널 무대를 밟았다. 하지만 시즌 막판 샌안토니오에 합류, 이전 시리즈까지는 부상과 팀 적응 등으로 경기에 제대로 나서지 못하며 샌안토니오의 파이널진출에 기여하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이렇게 맥그레이디는 개인기록은 화려했지만 반대로 그가 속한 팀들은 플레이오프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과연 리그의 트렌드를 주도할 정도로 NBA를 대표하던 슈퍼스타이자 동시에 비운의 슈퍼스타였던 맥그레이디의 농구인생은 어땠을지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고졸루키 맥그레이디, NBA 무대에 첫 발을 내딛다

맥그레이디는 1997 NBA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9순위로 토론토 랩터스에 입단했다. 맥그레이디는 고등학교 시절 야구와 풋볼을 즐기는 등 야구선수로써의 꿈을 키웠지만 키가 급격히 자라는 바람에 농구로 진로를 바꿨다. 비록 맥그레이디가 남들보다 늦은 고등학교 3학년부터 정식으로 농구를 시작했지만 그는 남다른 운동능력을 선보이며 실력이 일취월장해갔다. 실제로도 맥그레이디는 그 당시 뉴저지에서 열렸던 아디다스 ABCD 캠프에 참가, 고등학교 4학년 선배들을 상대로 한 수 위의 기량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마운트 자이온 기독 아카데미를 20승 1패의 호성적으로 이끄는 등 팀의 에이스로 활약, 많은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맥그레이디의 기록은 평균 27.5득점(FG 56.4%) 7.7리바운드 7.7어시스트. 당시 USA 투데이는 차세대 NBA를 대표할 슈퍼스타 25인 중 2위에 맥그레이디를 올려놓기도 했다. 이후 맥그레이디는 모두가 알다시피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곧바로 프로무대에 뛰어들었다.(*맥그레이디는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어번데일 고등학교에서 마운트 자이온 기독 아카데미로 전학을 갔다)

다만, 맥그레이디가 루키시즌부터 빛난 선수는 아니었다. 전문가들 역시 토론토의 선택에 의구심을 보내기도 했다. “잠재력만으로 맥그레이디에게 너무 높은 순위가 부여됐다”는 것이 이유였다. 실제로도 1997-1998시즌 토론토의 감독인 대럴 워커의 사임 전까지 맥그레이디의 플레이타임은 고작 13분에 불과했다. 이에 맥그레이디 스스로도 토론토에서 첫 시즌을 지옥이라 표현할 정도였다.

맥그레이디는 올랜도 매직으로 둥지를 옮기고 난후 가진 언론과 인터뷰에서 “토론토에서의 생활은 외로웠고 하루에 20시간을 잘 정도였다”라고 토론토에서 있었던 시간들을 회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토론토 시절 루키 맥그레이디는 그저 평범한 NBA 선수에 불과했다. 데뷔시즌인 1997-1998시즌 맥그레이디는 정규리그 64경기 출장, 평균 7득점(FG 45%) 4.2리바운드 1.5어시스트 기록했다.

다행히 시즌 말 워커가 사임하고 신임 감독 버츠 워커가 부임, 맥그레이디도 안정을 되찾으며 다음 시즌에 임했다. 하지만 그의 플레이는 데뷔시즌에 비해 별반 나아진 것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98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그의 사촌, 빈스 카터가 토론토에 입단하면서 팀 내 맥그레이디의 입지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맥그레이디는 1998-1999시즌 49경기 출장, 평균 9.3득점(FG 43.6%) 5.7리바운드 2.3어시스트 기록했었다.(*1998-1999시즌은 단일폐쇄시즌으로 60경기만 시행됐다)

하지만 토론토에서 맞이한 세 번째 시즌은 달랐다. 여전히 맥그레이디는 카터의 백업이었지만 기량 자체는 지난 두 시즌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맥그레이디는 1999-2000시즌 올스타전 덩크 컨테스트에서 화려한 덩크 퍼포먼스로 많은 팬들의 주목받은 것은 물론 전 시즌보다 일취월장한 기록과 경기력으로 토론토의 핵심멤버로 자리 잡는데 성공했다.

실제로 맥그레이디는 그해 올해의 후보상 후보명단에 이름을 올림과 동시에 3월말부턴 선발로 경기에 나서는 등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사촌형제 카터와 맥그레이디의 활약 속에 소속팀 토론토 역시 45승 37패를 기록,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다만, 토론토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를 맞아 시리즈 전적 3-0으로 탈락, 패배의 쓴 잔을 마셔야했다. 

맥그레이디는 1990-2000시즌 79경기 출장 평균 15.4득점(FG 45.1%) 6.3리바운드 3.3어시스트 기록했다. 득점은 전 시즌에 비해 거의 2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였다. 또, 79경기 출장 중 34경기가 선발 출장이기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맥그레디이는 플레이오프에서도 3경기 평균 16.7득점(FG 38.6%) 7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렇게 맥그레이디는 토론토에서의 마지막 시즌 자신의 이름을 NBA 팬들에게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곧 맥그레이디의 올랜도 이적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맥그레이디의 올랜도 행은 앞으로 다가올 동티맥 서코비 시대의 시작이자 플레이오프 1라운드 벽의 불운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동티맥 서코비’ 시대의 시작, 맥그레이디의 올랜도 매직행

앞서 언급했듯 1999-2000시즌 종료 후 맥그레이디는 자신의 재능을 고향인 플로리다의 올랜도로 가져갔다. 맥그레이디가 올랜도에 합류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선발출전보장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2시즌 간 카터의 백업으로 활약했던 맥그레이디는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하자 주전으로 출전하고픈 욕심이 생겼고 마침내 그는 올랜도가 내민 손을 잡았다. 맥그레이디와 올랜도는 2000년 여름 7년간 9,300만 달러의 대형계약에 합의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올랜도는 맥그레이디의 영입과 함께 코트위의 신사, 그랜트 힐을 팀으로 데려왔다. 때문에 많은 올랜도 팬들은 맥그레이디-힐 콤비가 과거 시카고 불스 왕조의 마이클 조던-스카피 피펜 콤비가 그랬던 것처럼 강력한 원투 펀치가 되어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실망뿐이었다. 시즌을 앞두고 야심차게 영입한 힐이 발목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한 것이었다. 힐의 경우 2000-2001시즌 4경기 출장에 그쳤고, 올랜도 이적 후 4년간 47경기 출장을 기록, 슈퍼스타에서 한순간에 FA먹튀로 전락했다.

그러나 힐의 부상이탈은 올랜도에겐 불운이었지만 맥그레이디에겐 행운이었다. 힐이 없는 올랜도의 외로운 에이스가 된 맥그레이디는 폭발적인 득점력을 선보이며 매 경기 올랜도의 팬들을 열광시켰다. 맥그레이디는 올랜도에서의 첫 시즌인 2000-2001시즌 평균 26.8득점(FG 45.7%)을 기록, 생애 첫 올-NBA 세컨드팀에 그 이름을 올리며 리그를 대표하는 슈터스타로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밀워키 벅스의 단장이던 어니 그런펠드는 맥그레이디를 가리켜 “리그를 대표하는 탑5 재능 중의 한명이다”라는 극찬을 보내기도 했다. 더불어 그해 기량발전상까지 수상하는 등 단 한 시즌 만에 리그 내에서 맥그레이디의 위상은 180도 달라져있었다. 맥그레이디는 2000-2001시즌 정규리그 77경기 출장 평균 26.8득점(FG 45.7%) 7.5리바운드 4.6어시스트 기록했다. 

이렇게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로 떠오른 맥그레이디의 활약에 힘입어 올랜도 역시 정규리그에서 43승 39패를 기록, 동부컨퍼런스 7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맥그레이디의 활약은 정규리그뿐만 아니라 플레이오프에서도 이어졌다.

밀워키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3차전, 맥그레이디는 42득점 10리바운드 8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4경기 동안 평균 33.8득점을 기록하는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다. 하지만 올랜도와 맥그레이디는 원맨팀의 한계를 느끼며 밀워키에 시리즈 전적 4-0으로 패배, 플레이오프 진출에 만족해야했다. 맥그레이디는 2000-2001시즌 플레이오프 4경기 출장 평균 33.8득점(FG 41.5%) 6.5리바운드 8.3어시스트 기록했다. 이는 맥그레이디의 플레이오프 커리어 사상 득점부문 하이기록이기도 했다.

이어진 2001-2002시즌에도 맥그레이디의 활약은 계속 이어졌다. 전 시즌에 이어 생애 2번째로 올-NBA 세컨드팀에 이름을 올림과 동시에 팀을 다시 한 번 플레이오프 무대로 이끌었던 맥그레이디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엔 샬럿 호네츠에게 패배, 또 다시 플레이오프 1라운드의 벽에서 좌절해야만 했다.

맥그레이디는 2001-2002시즌 정규리그 76경기 출장 평균 25.6득점(FG 45.1%) 7.9리바운드 5.3어시스트 기록, 2시즌 연속 +25득점을 기록했다. 또, 플레이오프에서도 4경기 출장 평균 30.8득점(FG 46.2%) 6.3리바운드 5.5어시스트 기록했다.

이렇게 올랜도 이적 후 계속해 상승세를 타던 맥그레이디는 마침내 2002-2003시즌, 자신의 이름을 NBA 역사의 한 페이지에 아로새긴다. 2002-2003시즌 티맥은 평균 32.1득점을 기록, 생애 첫 NBA 득점왕 타이틀에 이름을 올림과 동시에 NBA 단일 시즌 역사상 선수효율성 지수에서 30점을 넘기는 7번째 선수로 그 이름을 남기게 됐다.

맥그레이디는 2002-2003시즌 정규리그 76경기 출장 평균 32.1득점(FG 45.7%) 6.5리바운드 5.5어시스트라는 기록을 남겼다. 맥그레이디는 2002-2003시즌에만 +40득점 10회, +30득점 30회라는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였다. 

정규시즌의 활약에 이어 맥그레이디는 2002-2003시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디스트로이트 피스톤스를 맞아 3-1로 시리즈를 리드, 생애 첫 플레이오프 2라운드 진출을 눈앞에 두는 듯 했다. 실제로 5차전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도 “이번엔 2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로 강한 자신감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맥그레이디와 올랜도는 거짓말처럼 5,6,7차전을 디트로이트에게 내리 다 내줬고 맥그레이디의 꿈은 다시 한 번 무너졌다. 맥그레이디는 2002-2003시즌 플레이오프에서 7경기 평균 31.7득점(FG 44.8%) 6.7리바운드 4.7어시스트 기록, 올랜도에서 맞이한 플레이오프 세 시즌 모두 평균 +30득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계속된 탈락에 의기소침할 법도 했지만 맥그레이디는 절치부심, 2003-2004시즌에도 플레이오프 2라운드 진출을 향한 진격을 시작했다. 맥그레이디는 2003-2004시즌 평균 28득점(FG 41.7%)을 기록하며 2년 연속 NBA 득점왕 타이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2003-2004시즌이 맥그레이디 개인은 비상한 시즌이었지만 소속팀 올랜도가 그렇지 못했던 것은 옥에 티였다.

시즌 개막 직후 1승 10패를 기록하는 등 부진에 빠진 올랜도는 이 과정에서 닥 리버스 감독을 경질하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또 맥그레이디 역시 시즌 내내 팀의 단장인 존 웨이스브로드 등 구단 프런트들과 마찰을 빚었다. 결국, 올랜도는 집안단속에 실패함과 동시에 주축 선수들 대부분이 부상악령에 시달리며 21승 61패를 기록, 최악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반면,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 맥그레이디는 시즌 막판 워싱턴 위저즈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커리어-하이인 62득점을 올리는 등 개인적으론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2003-2004시즌 맥그레이디는 정규리그 67경기 출장 평균 28득점(FG 41.7%) 6리바운드 5.5어시스트 기록했다. 

이렇게 맥그레이디는 올랜도에서의 4시즌을 화려하게 보냈다. 맥그레이디의 활약은 ‘동티맥 서코비’라는 2000년대 NBA를 대변하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는 당시 리그 내에서 맥그레이디의 위상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실제로도 많은 이들은 서부 컨퍼런스의 코비 브라이언트와 맥그레이디를 라이벌로 조명하며 큰 관심을 가졌다. 또한 맥그레이디는 앨런 아이버슨-코비 브라이언트-빈스 카터와 함께 리그의 4대 스윙맨으로 주목받으며 많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다만, 토론토를 벗어나 계속해 꽃길만을 걸을 줄 알았던 맥그레이디와 올랜도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 아닌 새드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NBA를 대표하는 새로운 트렌드가 된 맥그레이디는 자신의 재능을 플로리다가 아닌 휴스턴의 뜨거운 갈바스톤 해변으로 가져가며 다시 한 번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티맥 타임의 시작 맥그레이디, 자신의 재능을 휴스턴으로 가져가다  

2004년 6월 29일, 올랜도와 휴스턴 로켓츠는 NBA역사에 길이 남을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바로 맥그레이디를 포함해 총 7명의 선수가 팀을 옮긴 4:3 트레이드를 단행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2003-2004시즌부터 이어져 온 맥그레이디와 올랜도 경영진과의 불화, 동시에 NBA 우승을 향한 맥그레이디와 휴스턴의 열망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올랜도 매직과 휴스턴 로켓츠 4대3 트레이드 개요
· 올랜도 매직 Get : 스티브 프랜시스, 커티노 모블리, 클레빈 카토
· 휴스턴 로켓츠 Get :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주완 하워드, 타이론 루, 리세 게인즈 

당시 휴스턴은 걸어 다니는 만리장성, 야오밍이라는 리그 정상급의 센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야오밍은 2002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휴스턴에 합류했다. 은퇴 후 휴스턴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는 것은 물론, 명예의 전당에도 그 이름을 올리는 등 NBA 커리어 내내 리그 정상급 센터 중 한 명으로 군림하던 야오밍이었다.

때문에 야오밍과 맥그레이디 콤비의 결성은 많은 휴스턴 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이들의 최종 목표인 파이널 우승으로 가기엔 어딘가 2% 부족한 모습이었고 이에 휴스턴은 추가 트레이드들을 단행, 밥 수라, 데이비드 웨슬리 등 알짜배기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며 2004-2005시즌 NBA 우승을 위한 예열을 마쳤다.

예상대로 야오밍과 맥그레이디 콤비의 위력은 대단했다. 휴스턴의 모든 공격은 맥그레이디의 손에서 시작해 맥그레이디의 손으로 끝났다. 올랜도 시절 득점에만 집중하던 것과 달리 휴스턴에서는 패스에도 집중, 맥그레이디는 더욱 더 막기 힘든 선수로 또 한 번 진화했다. 또, 야오밍이 버티는 인사이드는 다른 팀들에게 쉽게 골밑을 내주지 않았다. 더불어 하워드, 수라 등 야오밍-맥그레이디 원투펀치를 받치는 조력자들의 알토란같은 경기력이 더해지면서 휴스턴의 공격력은 매 경기 불을 뿜었다.

이렇게 야오밍-맥그레이디 콤비와 조력자들의 활약을 앞세워 환상적인 시즌을 보낸 휴스턴은 2004-2005시즌 51승 31패를 기록, 서부 컨퍼런스 5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맥그레이디는 2004-2005시즌 정규리그 78경기 출장 평균 25.7득점(FG 43.1%) 6.2리바운드 5.7어시스트 기록, 여전한 득점력을 과시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댈러스 매버릭스를 만난 휴스턴은 맥그레이디의 활약 속에 초반 시리즈를 2-0으로 리드했다. 맥그레이디는 2차전 당시 리그 최장신을 자랑하는 숀 브래들리(229cm)앞에서 인-유어 페이스 덩크를 꽂는 하이라이트 필름을 만들어 내는 등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다. 이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가 되고 있다.

이렇게 맥그레이디는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평균 30.7득점(FG 45.6%) 7.4리바운드 6.7어시스트라는 전천후 활약을 펼쳤다. 야오밍도 평균 21.4득점(FG %) 7.7리바운드를 기록, 지원사격을 톡톡히 했다. 다만, 마지막 7차전 맥그레이디가 경기시작과 동시에 6개 연속으로 야투를 놓치는 등 부진을 거듭, 결국 플레이오프 2라운드 진출권을 아쉽게도 댈러스에게로 넘겨주고만 맥그레이디와 휴스턴이었다.

하지만 맥그레이디에게 2004-2005시즌이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35초 동안 무려 13득점을 기록한 맥그레이디의 ‘티맥 타임’이 탄생한 것이 바로 이때였기 때문.

2004년 12월 10일(이하 한국시간), 휴스턴의 홈구장 도요타 센터에선 샌안토니오와 휴스턴의 홈경기가 있었다. 휴스턴은 종료 37초를 남기로 68-76, 8점차 리드를 당했고 경기장을 찾은 모든 이들도 휴스턴의 패배를 예상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맥그레이디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맥그레이디는 이어지는 공격에서 3점슛을 성공, 휴스턴은 71-76으로 점수를 좁혔다. 하지만 휴스턴은 파울작전으로 다시 2점을 내주며 점수는 71-78, 7점차로 벌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공격에서 맥그레이디는 3점슛과 함께 파울을 얻어내며 거짓말처럼 4점 플레이를 성공, 점수를 75:78, 3점차로 좁히는데 성공했다.

이어지는 공격에서 샌안토니오는 다시 한 번 공격에 성공하며 점수를 75-80, 다시 5점차로 벌리며 도망가면서 한숨을 돌리는 듯 했다. 하지만 맥그레이디가 또 다시 3점슛을 성공시키며 점수는 78-80이 됐고 승부는 안개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급기야 맥그레이디는 경기 종료 11초를 남기고 시작된 샌안토니오의 공격에서 상대방의 공을 스틸, 곧바로 상대진영으로 넘어와 위닝 3점슛을 성공시키며 대역전극은 막을 내렸다.

‘35초 동안 무려 13득점.’ 레지밀러의 밀러타임과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1분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른바 ‘티맥 타임’이 탄생한 것이었다. 심지어 한국의 모 포탈사이트에선 이미 티맥타임이 국어사전에 등록이 되어있을 정도로 티맥 타임이 만들어낸 임팩트를 실로 어마어마했다.(*밀러는 1994-1995시즌 뉴욕과의 동부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 1차전에서 11초 동안 8점을 몰아치며 팀의 107-105 역전승을 이끌었다)



▲천재박명, 부상악령에 발목을 잡힌 맥그레이디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안 좋은 일이 따른다”는 의미의 사자성어, 호사다마(好事多魔)처럼 맥그레이디의 커리어가 매 시즌 장밋빛은 아니었다. 맥그레이디는 휴스턴에서 맞이한 2번째 시즌인 2005-2006시즌, 등부상으로 47경기 출장에 그쳤다. 에이스가 빠진 휴스턴 역시 34승 48패를 기록, 플레이오프에 탈락하는 불운을 맛봤다. 맥그레이디는 2005-2006시즌 정규리그 47경기 출장, 평균 24.4득점(FG 40.6%) 6.5리바운드 4.8어시스트 기록했다.

2006-2007시즌에도 맥그레이디는 등 부상으로 시즌 초반 7경기에 결장하며 불안한 출발을 알렸다. 맥그레이디 스스로도 당시 언론 매체들과 인터뷰에서 “등부상이 내 신체능력을 악화시켜 예전같이 스피드 있는 모습은 보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맥그레이디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맥그레이디는 이 분야에서 뛰어난 의사로 소문난 존 패터슨 박사를 찾아가 꾸준히 치료를 받았고 끝내는 등부상의 악령을 이겨냈다.

결국, 맥그레이디는 건강한 모습으로 휴스턴 팬들 앞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팀의 인사이드 핵심인 야오밍이 왼쪽 다리부상으로 쓰러지며 휴스턴은 다시 위기를 맞았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휴스턴이 추락할거라 생각했지만 휴스턴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야오밍은 2006-2007시즌 48경기 출장에 그쳤다. 부상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평균 25득점(FG 51.6%)을 기록, 자신의 커리어-하이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쾌조의 컨디션을 뽐내던 차였기에 그의 부상이탈은 더욱 뼈아팠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맥그레이디를 중심으로 단단히 뭉친 휴스턴은 52승 30패, 리그에서 5번째로 좋은 성적을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맥그레이디는 전과 달리 개인이 아닌 팀을 살리는 플레이를 펼치는 등 한층 더 성숙된 플레이를 보여줬다. 또 맥그레이디 개인도 2006년 12월 29일, NBA 역사상 14,000득점 4,000리바운드를 기록한 선수들 중 세 번째로 어린 선수로 그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맥그레이디는 2006-2007시즌 정규리그 71경기 출장 평균 24.6득점(FG 43.1%), 5.3리바운드 6.5어시스트 기록했다.

이렇게 선수생활에 치명적인 등부상을 이겨내고 성공적으로 복귀한 맥그레이디였다. 하지만 그에게 플레이오프 1라운드 벽은 여전히 높았다. 2006-2007시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유타 재즈를 만난 휴스턴과 맥그레이디는 야오밍이 복귀했음에도 시리즈 전적 4-3으로 유타에게 패하며 다시 한 번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멈춰야만 했다.

맥그레이디는 “다음에도 휴스턴이 플레이오프 2라운드 진출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모두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기는 등 1라운드 패배의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 하는 모습이었다. 맥그레이디는 2006-2007시즌 플레이오프 7경기 출장 25.3득점(FG %) 5.9리바운드 7.3어시스트 기록했다.

와신상담하며 2007-2008시즌을 맞이한 맥그레이디는 2008년 1월 29일부터 3월 16일까지 휴스턴의 22연승을 이끌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22연승 중 12연승이 야오밍없이 기록한 승리라는 점이었다. 결국, 휴스턴은 정규리그 55승 27패, 서부 컨퍼런스 5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 다시 한 번 유타를 만나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 맥그레이디는 2007-2008시즌 정규리그 66경기 출장, 평균 21.6득점(FG 41.6%) 5.1리바운드 5.9어시스트 기록했다.

하지만 하늘은 휴스턴과 맥그레이디에게 쉽게 복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맥그레이디는 유타와의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어깨와 무릎부상 등이 재발, 어깨와 무릎에 붕대를 감는 것은 물론, 진통제까지 맞아가며 시리즈를 치르는 등 부상투혼을 보여줬다.

이정도 부상이면 경기력에 악영향을 줄 법도 했지만 부상도 그의 플레이를 막지는 못했다. 맥그레이디는 시리즈 기간 동안 평균 27득점(FG 42.5%)을 기록하는 등 마지막 6차전에선 40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하늘은 끝내 맥그레이디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맥그레이디는 2007-2008시즌 플레이오프 6경기에서 평균 27득점(FG 42.5%) 8.2리바운드 6.8어시스트 기록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또 다시 유타에게 시리즈 전적 4-2로 패해 무릎을 꿇었다.

문제는 이때 당한 부상의 후유증들이 이후 2008-2009시즌에도 계속 되었다는 점이다. 2007-2008시즌 플레이오프 종료 후 맥그레이디는 곧바로 왼쪽어깨와 왼쪽 무릎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의 어깨와 무릎은 계속해 그를 괴롭혔다. 실제로 맥그레이디는 부상의 여파로 2008-2009시즌 35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다. 시즌 중에도 수술을 받는 등 부상악령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하늘은 그의 노력에 답을 주지 못했다. 맥그레이디는 2008-2009시즌 정규리그 35경기 15.6득점(FG 38.8%) 4.4리바운드 5어시스트 기록하는데 그쳤다.

결국, 팀 리빌딩을 천명한 휴스턴의 정책에 맞물려 맥그레이디는 화려했던 휴스턴 시절을 뒤로하고 2010년 2월 18일 트레이드를 통해 뉴욕으로 둥지를 옮기게 된다. 



▲리그를 대표하는 득점기계에서 리그를 대표하는 저니맨으로..

맥그레이디는 이렇게 2009-2010시즌 도중 휴스턴에서 뉴욕으로 전격 트레이드됐다. 트레이드 발생 후 이틀 뒤 맥그레이디는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와 가진 뉴욕 데뷔전에서 26득점을 올리며 잠시나마 부활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맥그레이디도 더 이상 예전의 그 맥그레이디가 아니었다.

결국, 시즌 내내 부상악령에 시달렸던 맥그레이디는 뉴욕에서 24경기 평균 26.1분 출장, 9.4득점(FG 38.9%)을 올리는데 그치며 시즌을 마쳤다. 이후 맥그레이디는 부상악령과 사투를 벌임과 동시에 부활을 꿈꾸며 디트로이트, 애틀랜타 호크스에서 계속해 선수생활을 이어갔지만 끝내는 부활하지 못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맥그레이디의 열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맥그레이디는 2012-2013시즌을 앞두고 중국 CBA의 산동 칭다오 더블스타로 전격이적, 농구선수로써의 꿈을 계속 이어갔다. 또, 앞서 언급한대로 2012-2013시즌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샌안토니오에 합류해 파이널 무대를 밟았지만 끝내는 NBA 우승에는 실패했다.

결국, 맥그레이디는 2013년 8월 NBA 은퇴를 선언, 그는 다시는 코트 위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농구선수 맥그레이디는 팬들의 곁은 떠났다. 하지만 맥그레이디는 지금도 자신의 꿈을 위해 달리고 있다.

그 예로 2014년 2월 4일. 맥그레이디는 “이번에는 야구선수로써 팬들에게 돌아오겠다”고 선언, 실제로 2달 뒤인 4월 23일 마침내 자신이 공동 소유주로 있는 마이너리그 미시시피 피록시 구단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며 야구선수로써 활동을 계속하기도 했다. 이후 맥그레이디는 애틀란틱 리그 올스타전에서 자신의 첫 삼진을 잡은 뒤 야구계 은퇴를 선언했다.

폭발적인 득점 능력과 운동능력. 또 경기 도중 1인 백보드 앨리웁을 시도하는 대담함과 창의성까지. 맥그레이디는 누구나 인정하는 NBA 최고의 득점기계였다. 실제로 지난해 여름 정든 NBA 코트를 떠난 브라이언트 역시 자신이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선수로 맥그레이디를 꼽을 정도로 맥그레이디는 2000년대 NBA의 트렌드를 주도했던 슈퍼스타였다.

이제는 더 이상 맥그레이디의 화려한 플레이를 실제 경기장에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19일 NBA 사무국 측의 발표에 따르면 맥그레이디는 올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 이제는 정말 NBA를 대표하는 전설로 거듭났다. 맥그레이디는 이에 대해 “내가 이곳에 있게 됐다는 것이 믿기지 않다. 하지만 아직은 이로써 내 꿈이 다 이뤄진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흔히들 사람들은 맥그레이디를 가리켜 브라질의 축구영웅, 호나우두와 같이 몸이 재능을 버티지 못했던 선수라고 평가하고 있다. 호나우도처럼 한창 전성기를 구사할 나이에 맥그레이디는 그러지 못하고 점점 더 코트와 멀어져갔다. 이미 전부터 맥그레이디의 과격한 동작들이 그의 무릎을 망가뜨렸다는 보도들은 수차례 TV와 신문들을 통해 보도된 바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앞서 맥그레이디는 자신의 꿈이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밝힌 바 있다. 자신이 꾸고 있는 꿈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농구선수가 아닌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전설, 맥그레이디의 꿈을 응원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프로필

1979년 5월 24일 미국출생, 203cm 102kg, 슈팅가드-스몰포워드
NBA 득점왕 2회 (2002-2003,2003-2004) NBA 올스타 7회 선정(2001~2007) 올-NBA 퍼스트팀 2회 선정(2001-2002, 2002-2003) 올-NBA 세컨드팀 3회 선정(2000-2001, 2003-2004 2006-2007) NBA 기량발전상(2001)
NBA 정규리그 통산 938경기 출장, 평균 19.6득점 5.6리바운드 4.4어시스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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