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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이란 무엇인가? 가와사키 무네노리의 이야기
출처:다음스포츠|2017-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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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캐릭터는 딱 한 글자로 표현된다. ‘깝’이다. 일본 선수 특유의 진중함? 그런 거 안 가지고 다닌 지 오래됐다. 철딱서니라고는 1도 없다. 나대는 걸로는 아마 세계 정상급일 것이다.

젊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그가 활약하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소프트뱅크의 전신)에서 그랬다. 경기 시작전, 그리고 중간중간에 나오는 응원곡에 맞춰 덕아웃에서 추는 막춤이 유명했다. 팬들은 ‘무네린 댄스’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이제 나이도 만만치 않다. 1981년생이니, 올해 36살이나 됐다. 그런데도 여전하다. 까불고, 낄낄거리고, 잠시도 유쾌함을 놓지 않는다. 말이나 잘 통하나. 절대 아니다. 영어는 거의 알아듣기 힘든 수준이다. 하긴 몸으로 대화를 하는 스타일이니, 그런 게 필요 없을 지도 모른다.

야구가 잘 돼서 그런가? 별로 그렇지도 않다. 그는 풀타임 메이저리거도 아니다. 마이너리그에서 머무는 시간이 훨씬 많다. 가끔 자리가 비면 올라가는 땜빵 역할이 기껏이다. 그런데 참, 속도 좋다.



거액의 일본 복귀 요청을 거부…또 마이너리그 계약 

그의 이름은 가와사키 무네노리다. 시카고 컵스의 백업 내야수다.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다. 물론 후보 주제에 자리 가릴 여유는 없다. 2루수도, 3루수도…, 형편 닿는대로 맡는다. 가끔은 포수 훈련도 한다. 메이저리그 5년간 통산 276경기에 타율 .237, 1홈런 12도루가 전부다.

그는 지난 주 잔류를 결정했다. 명색이 FA였는데, 이렇다할 계약 내용도 없다. 늘 그렇듯이 마이너리그 계약이다. 스프링캠프 트레이닝에 초청선수로 참가할 수 있다는 게 유일한 플러스 옵션이다. 거기서 성적이 좋으면? 그래봐야 올라갈 자리는 없다. 미국 진출 후 시범경기에서 항상 3할 이상의 타율을 보였다. 작년 캠프에서는 .381(42타수 16안타)를 치고도 개막 로스터에서 탈락했다.

오갈 데 없는 신세라 그냥 남기로 했나? 천만에. 원 소속팀인 일본의 소프트뱅크는 그를 간절히 원했다. 오사다하루(왕정치) 회장은 “이제 고생 그만하고 제발 돌아오라”고 직접 메시지를 전했다. 말 뿐만이 아니다. 3년간 12억엔(약 130억원)을 보장한다는 내용도 흘러나왔다. 컵스의 연봉(추정액 50만 달러ㆍ약 6억원)의 수십배가 넘는 금액이다. 하물며 그가 달던 번호 52번은 여전히 비워졌다. 6년째 주인을 기다리는 상태다. 



이치로와 브로맨스

일본에서는 꽤 잘 나가던 선수였다. 도루, 최다안타 등 개인 타이틀은 물론 올스타는 거의 고정 멤버였다. 마쓰나카 노부히코, 고쿠보 히로키, 조지마 겐지 등과 ‘다이(에) 하드 타선’을 구축하며 호크스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WBC(2006년, 2009년)와 올림픽(2008년) 대표팀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2011년 시즌이 끝나면서 인생의 파도가 출렁이기 시작됐다. 해외 진출 FA 자격을 얻은 시점이다.

그의 결심은 미국행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시아 출신 타자(특히 내야수)들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던 때였다. 그런 분위기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한 술 더 떠 아예 자기가 갈 팀도 지정했다. 시애틀 매리너스였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이치로 상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오야지(おやじ 영감님ㆍ그는 이치로를 이렇게 불렀다)는 내가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우상이었다. 그와 한 팀에서 뛰는 것이 꿈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미국으로 갈 이유는 없다.”

이치로를 향한 그의 열망은 유명하다. 일본 시절 백넘버 52번은 이치로의 51번 다음 번호라서 택한 것이다. 시애틀 시절에는 52번을 달 수 없게 되자 61번을 택했다. 거꾸로 읽으면 (이치로쿠) 이치로와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짝사랑은 아니었다. 이치로도 그를 총애했다. 2006년 WBC 대표팀에서 만나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 뒤로 해마다 오프 시즌 때 같이 훈련하는 파트너가 됐다. 이치로는 이렇게 밝혔다. “메이저리그에서 오래 뛰었지만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존재는 큰 도움이 된다.”



신혼여행으로 마이너리그 구장 순례

브로맨스인가? 둘 사이가 핑크빛인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런 낭만이 비즈니스에 도움될 리 없다.

생각해 보시라. 시애틀은 필요 없다는 데, ‘난 그래도 니네 팀에 꼭 들어가야 돼’라는 고집이 통하겠느냐 말이다. 결국 이 계약은 말도 안되는 헐값에 이뤄졌다. 연봉 62만 5천 달러(약 7억 5천만원)에 합의됐다. 그것도 달랑 1년짜리 마이너리그 계약이었다.

일본에서 전년도 연봉이 2억 4천만엔(약 26억원)이었다. FA 선언을 하면 15~20억엔(약 140~220억원)짜리 대형 계약도 충분했다.

당시에 대한 그의 회상이다. “나도 사람이다. 돈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나. 그 무렵 결혼을 해서 가족이 생겼다. 때문에 더더욱 경제적인 안정감이 필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치로 선배가 있는 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신혼 여행으로 미국을 갔다. 마이너리그 구장들을 몇 군데 돌아봤다. 결국 아내가 동의해줬다. 아주 흔쾌하게.”

그가 덧붙였다. “매일 고급 요리를 먹고 싶다거나, 좋은 차를 타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내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야구를 할 수만 있다면…’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조건을 붙인다면 ‘과연 어디서, 어떻게 하느냐’라는 문제일 것이다.”

해외 진출의 명분은 무엇인가

작년 시즌이 끝나고 KBO 리그 출신의 여러 스타들이 미국을, 또는 일본 무대를 노크했다. 그러나 대부분 뜻을 접었다. 대신 국내 구단과 계약을 맺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 조건이었으리라.

물론 비난받을 일은 전혀 아니다. 프로의 세계 아닌가. 연봉은 곧 신분이나 출전 기회와 비례한다. 죽어라 고생만 하고, 빛도 못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현명한 결정일 것이다. 게다가 전략적인 측면도 있을 지 모른다. 해외 진출설이 FA 협상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반론은 이뤄져야 한다. 그들이 해외 진출 계획을 밝힐 때 늘 수식하는 키워드 말이다. ‘꿈’이나 ‘도전’이라는 명분은 과연 적절하냐는 것이다.



장훈 씨는 일본에서 독설가로 유명하다. 그가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가와사키를 향해 이렇게 쏘아붙였다. “2할 1푼짜리도 야구 선수냐? 마스코트 취급이나 받으면서 거기 있을 이유가 뭐냐. 미국 여행 다 했으면 이제 돌아와서 친정팀이나 살펴라.”

그런 얘기를 들었는 지 못 들었는 지…. 당사자는 태연하다. 복귀설이 나올 때면 이렇게 말한다. “이미 일본을 떠날 때 그렇게 결심했다. 완전히 (몸을) 태우러 가는 것이니까…, 나중에 뼈라도 건져서 돌아가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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