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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유학생’ 오종균, KBL 데뷔를 꿈꾸다
- 출처:점프볼|201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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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가 좋아서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서 농구를 하며 KBL 입성을 꿈꾸는 청년이 있다. 주인공은 후지대 4학년에 재학 중인 오종균.
2009년 대진고를 졸업 후 명지대에 입학한 오종균은 1학년을 마치고 농구를 그만둔 후 일반 학생 신분이 되었다.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후 다시 사회로 돌아온 그의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농구선수로서의 삶에 대한 열망이 존재했다.
우연. 아니,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는 계기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 오종균은 일본 이와테현 하나마키시에 위치한 후지대학교로 편입해 농구와 공부를 병행하며 농구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일본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리며 프로 농구선수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올해 4학년인 그는 KBL 입성을 위해 지난 8월 6일 한국으로 돌아와 1차 목표인 일반인 드래프트 통과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Q.본인 소개 부탁드려요.
A.안녕하세요. 일본 후지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오종균이라고 합니다. 신장 184cm, 몸무게 82kg으로 포지션은 슈팅가드입니다.
Q.한국에서 농구를 언제까지 했나요?
A.대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에 입학해 1년 동안 농구부에 있었어요. 고등학교까지만 해도 경기를 많이 뛰었는데 대학교에 가니 선배들도 많고 운동 강도나 분위기 자체가 너무 다르더라고요. 당연히 제가 경기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죠. 그 당시엔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2009년 11월 농구를 그만두게 됐어요.
Q.일본으로 농구 유학을 떠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A.농구를 그만두고 일반 학생으로 한 한기를 다니고 군대에 입대했어요. 특공연대에서 군 복무를 했는데 주말에 우연히 TV에서 대학농구 중계를 봤죠. 순간 ‘아 다시 농구를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더니 그때부턴 일과 끝나고 매일 농구공을 튕기고 있더라고요. 저희 부대에 체육관이 있었는데 중대장님과 대대장님도 제가 농구했던 걸 아셔서 틈틈이 운동을 하게끔 배려해 주셨어요. 그렇게 군 복무를 마치고 명지대학교에 다시 찾아갔지만 팀 여건상 제가 다시 운동을 할 수는 없었죠. 다른 학교로 편입을 알아보면서 대진고에서 운동을 하다가 거기서 정학모 선생님을 만났는데, 제 농구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일본에서 농구를 해 볼 생각 있냐”라고 물어보셨어요. 우리나라 대학에서 농구를 다시 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농구를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기에 당연히 하겠다고 말했고, 원인구 선생님을 소개해주셔서 면담을 하게 됐죠. 면담을 하기 전에는 그저 ‘농구만 할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이었지만, 면담을 하고 난 후에는 다시 고민이 되더라고요. 한국을 떠나 일본에 가게 되면 가족과도 떨어져 지내야 하고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요. 하지만 일본에 가게 되면 외국어도 배울 수 있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농구를 다시 할 수 있었기에 일본 유학을 선택하게 됐어요.
Q.준비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A.유학을 가자고 결심했기에 매일매일 바쁜 일상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2012년 10월부터 일본어 학원을 다녔어요. 아침 6시 반 수업을 듣고 학교 수업을 받으러 갔었죠. 방학을 한 다음엔 집중반에서 일본어 공부에 더 매달렸고 2013년 2월까지 학원을 다니다 후지대학교에 재직 중이신 김형준 교수님과 한국에서 간단히 일본어 테스트를 했고, 다행히 합격점을 받아 3월 18일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어요.
Q.후지대학교에서 첫 해는 어땠나요?
A.4월 후지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곧바로 센다이 대학교로 전지훈련을 갔어요. 일본에 처음 가자마자 놀라웠던 게 일본은 보통 대학교마다 팀당 평균적으로 30명 이상씩 있거든요, A팀, B팀으로 나눠서 훈련을 하곤 하죠. 합동 훈련을 하는데 너무 거칠더라고요. 플레이 자체가 우리나라와 다르기 때문에 파울콜도 너무 다르고, 처음에 적응하는데 무척이나 힘들었어요. 게다가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다 보니 훈련하면서 패스도 제대로 안 주고 말도 잘 안 걸고. 혼자 동떨어진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Q.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라서 힘들었을 것 같아요.
A.1학년 때는 말 그대로 ‘적응’의 기간으로 삼았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으니까요. 제가 한국에서 농구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빨리 익히려고 했어요. 아침 5시에 일어나 씻고 곧바로 일본어 공부를 8시 30분까지 하고 9시에 수업에 들어가서 오후 5시까지 수업을 받은 다음부터 팀 훈련을 했어요. 이런 일상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일본에 있는 동안 계속 시행했었죠.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인지 체중이 불거나 하는 불상사는 없었고, 조금씩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다 보니 농구에도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1학년 때는 식스맨으로 10분 정도 경기를 뛰면서 팀원들에게 ‘나도 너희와 같은 팀이다’라는 걸 인식시켜 줬던 것 같아요.
Q.2학년이 돼서는 어땠나요?
A.2학년 때 동계훈련을 할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체력 훈련의 강도가 굉장했죠. 힘들긴 해도 몸이 힘든 부분이었기에 잘 참고 이겨낼 수 있었어요. 동계 훈련이 끝나고 시즌이 시작됐는데 저희 학교가 근 몇 년간 성적을 내지 못 했어요. 시즌 첫 대회인 잇방센슈켄(지역일반선수권대회)에서 팀이 마지막 상황에서 지고 있었는데, 제가 3점슛을 연속으로 3개를 넣어서 역전승을 거뒀어요. 골을 넣을 때마다 벤치에서 응원은 물론, 관중에서 ‘대한민국’이라고 환호를 해줄 때 소름이 돋더라고요. 농구할 맛 났었죠(웃음). 2학년 때는 모든 대회를 나갈 때마다 주전으로 뛰었고 연습경기에서 대부분 승리를 거뒀어요. 제가 활약해서 이긴 경기도 많았고 뿌듯했죠.
Q.일본은 큰 규모의 전국대회가 있다고 들었어요.
A.일본 대학교는 1부부터 4부까지 총 1,000개가 넘어요. 후지대학교는 제가 입학하기 10년 전까지 2부 팀이었다가 최근에 1부로 편입했어요. 일본은 간토 지방(도쿄), 간사이 지방(오사카) 애들이 농구를 굉장히 잘해요. 이렇게 잘하는 친구들이 모이는 곳이 인카레(일본 전국대회)대회인데, 지역별로 상위 2팀이 출전하죠. 도쿄 하라주쿠 요요기 체육관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일본 선수들이 한 번이라도 나가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권위 있는 대회에요. 학교에서 인카레 나간다고 잔치가 열렸죠. 우리나라로 치면 정기전 우승한 분위기랄까요? 전국대회 1차전 상대는 타쿠쇼쿠 대학 이었는데, 전국에서 탑4에 드는 학교였어요. 상대팀에도 저처럼 외국인 유학생이 있었는데, 2m임에도 외곽슛을 던지는, 말 그대로 쇼킹한 선수였어요.
Q.일본은 한국 고교, 대학, 프로 팀들과 많은 왕래가 있어요. 마주친 적이 있었나요?
A.2학년 여름인 2014년 8월에 이와테 하나마키 온천에서 한중일 친선대회가 열렸어요. 우연찮게 선수단 통역을 하게 되었는데, 남자는 경복고, 여자는 숙명여고, 숭의여고가 합쳐서 왔었죠. 통역이란 게 일본어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상황 대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오기 전에 관련된 용어를 다시 공부해서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 경기와 지도자 회의, 관광, 선수들 장기자랑 등 기타 여러 곳에서 외국어로 누군가를 위해 통역을 하고 있다는 게 너무 기분이 좋고 성취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Q.적응을 마치고 경기도 많이 뛰면서 3학이 돼선 확실히 달랐겠죠?
A.3학년 땐 팀에서 주축 선수가 되었어요. 저를 위한 전술이 생겨났고 감독과 코치, 동료 선수들의 신뢰를 많이 받았어요. 일본에 처음 왔을 때와는 180° 달라 진거죠. 전국 대회 진출이 달린 대회에서 8경기 동안 3점슛 45개를 성공시켰고, 성공률이 48%였어요. 도호쿠 지역 새로운 신기록으로 제 이름이 기록됐어요. 그 결과 3점슛상과 득점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만끽했죠. 일본 사람들이 제게 “우리 고등학교 애들 좀 가르쳐 달라”라고 말하더라고요. 또 “한국은 다 슛이 좋냐”라고 묻기도 하고 한국이 농구를 잘한다고 이야기해주는데 굉장히 뿌듯했죠.
Q.좋은 활약을 펼쳤다고 했는데, 대표팀이나 선발팀에 발탁된 적은 없었나요?
A.저는 한국에서 대표나 선발로 발탁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일본에서 3년 연속 도호쿠 지역 대학대표선발로 뽑혀서 자랑스러웠어요. 1학년 때는 유학생이라서 제가 어떤 선수인가 한번 보기 위해 후보 명단에 올라 테스트를 봤었는데 거기서 좋은 모습을 보여 선발됐고, 2, 3학년 땐 경기 기록과 준수한 활약을 통해 선발되는 기쁨을 누렸어요.
Q.올해가 4학년인데 경기를 안 뛰고 있는 건가요?
A.대학교 4학년인 올해는 경기를 뛰지 못 했어요. 명지대학교에서 1년을 선수로 뛰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순 없기에 오후엔 팀 연습은 같이 하고, 오전엔 도쿄에 있는 사이타마 다이토문화대학교에 돈을 내고 숙소로 들어가서 같이 훈련을 했어요. 4학년 때 경기를 뛰지 못하는 걸 알았기에 연습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 3학년 때까지 수업을 타이트하게 들었어요. 또한 4학년 땐 졸업논문을 써야 하는데 2학기엔 제가 한국에 와야 했기 때문에 3월부터 8월까지 하루에 5~6시간을 졸업논문에 투자했어요. 스포츠이벤트마케팅에 관해 작성했는데, 한국에 있는 책을 가져와서 일본어로 번역을 한 후 다시 정리를 했어요. 다행히 성적 우수자와 동시에 졸업요건을 갖추게 돼서 현재는 한국에 머물고 있어요.
Q.3년 반 동안 느낀 일본 농구는 어땠나요?
A.굉장히 거칠어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때리고 할퀴고 해도 파울콜이 없어요. ‘아’라고 하면 동료들이 그걸 따라 하면서 놀리곤 했어요. 저도 수비를 할 때 어느 순간부터 일본 선수들처럼 다소 터프한 수비를 하게 되더라고요. 일본 선수들은 작지만 정말 빠른 편이에요. 쫓아가는데도 버거울 때가 있었는데, 계속 그런 선수들과 부딪히고 경쟁하다 보니 스피드가 좋아지는 걸 느꼈어요. 터프하고 과격한 수비에 고전한 것이 사실이지만 속으로 ‘이것도 못 벗겨내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싶었어요. 일본 농구를 경험하면서 훼이크 동작이나 볼 없을 때 움직임이 가장 많이 늘었어요.
Q.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을 텐데요.
A.솔직히 없었다면 거짓말인 것 같아요. 유학생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했고, 제가 못하면 ‘우리나라를 안 좋은 시선으로 볼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요. 농구를 잘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공부 역시 게을리 할 수 없었어요. 일정 수준의 성적에 도달하지 않으면 농구를 할 수 없었으니까요. 공부와 농구를 병행한다는 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그때마다 김형준 교수님이 좋은 말씀과 함께 격려를 해주셨어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Q.한국에 와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A.제 모교인 대진고등학교가 해체됐지만, 체육관은 사용할 수 있어서 슈팅 연습을 하고 있어요. 팀 훈련은 홍대부고 이무진 코치님의 배려로 같이 연습을 하고 있고, 야간에는 웨이트를 하면서 몸을 키우고 있어요. 일본에서 몰텐공으로 농구를 해서 공에 적응할 필요가 없어서 이런 부분은 좋은 것 같아요.
Q.올해는 황금드래프트라고 불릴 만큼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와요.
A.한국에 오기 전, 드래프트 동기들이 누구인지 체크해보고 유튜브를 통해 봤어요. 확실히 올해 좋은 선수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친구들을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그보다 먼저 일반인 테스트 때 제 장점을 어필하고, 저만의 플레이에 집중해서 테스트를 통과한 다음 본 드래프트에서 좋은 경쟁을 하고 싶어요.
Q.KBL에 진출하게 된다면 어떤 선수가 되고 싶나요?
A.일본에서 농구를 할 땐 팀에서 에이스 역할을 맡았어요. 또한 슛 시도도 많았고요. 제가 프로에 진출하면 얼마나 경기에 투입될지는 모르겠지만 승리하기 위해선 ‘이 선수가 잡으면 믿음이 간다’라는 슈터가 되고 싶어요. 또한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는, 일본에서 농구를 하며 꿈을 키워온 선수가 프로에 와서 장기인 슛을 바탕으로 팀에 활력소가 되고 팀은 물론, 관중에게 믿음이 가는 슈터로 이름을 떨치고 싶고, 최종적으로는 KBL을 대표하는 슈터가 되고 싶어요.
Q.슈터로서 작은 신장은 분명 단점으로 지적될 것 같아요.
A.제가 슈터로서 큰 키가 아니에요. 남들과 똑같이 슛을 던져선 안 되기 때문에 일본에서 저만의 무기를 갈고 닦았어요. 남들보다 반 박자 빠르게 슛을 던지고, 슛 거리를 길게 가져가고 있죠. 슛 거리가 길기 때문에 수비를 끌어낼 수 있고, 그로 인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현역 시절 문경은 감독님처럼 원 투 스텝을 밟고 무빙슛을 던지거나, 조상현 코치님처럼 반 스텝을 밟고 쏠 때도 있어요. 일본에 있을 때 제가 슈터인 줄 알고 수비가 타이트할 때가 많았기에 픽앤롤도 많이 연구하고 연습했어요. 슈터라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슛이 다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패스도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죠. 드리블에 있어선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 많이 치기보단 필요에 따라 간결하게 치는 편인 것 같아요.
Q.끝으로 드래프트에 임하는 각오 부탁드려요.
A.일본에서 절실함 없이 그냥 지냈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 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명지대에서 운동을 그만두고 인생에서 처음 큰 좌절을 느낀 게 사실이지만, 더 간절하고 열심히 하자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저를 모르고 있겠지만, 이런 선수도 프로농구를 위해 도전하고 있으니 많은 응원을 부탁드리고, 이번 드래프트 참가가 갑작스레 이루어진 결정이 아닌, 4년 동안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준비를 했기에 꼭 프로선수가 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실력 있는 슈터로 인정받고 싶어요. 끝으로 일본 농구 유학생, 저 오종균이라는 선수에게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오종균 일본 현지 경기 및 훈련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