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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농구, 이제는 세계 바라볼 때
- 출처:OSEN|2014-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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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대를 바라봐야 아시아 제패도 가능하다. 5전 전패로 16년 만의 세계무대 도전을 마친 남자농구 대표팀이 준 교훈이다.
2014 FIBA 스페인 농구월드컵이 지난 15일 미국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남자농구 대표팀은 16년 만에 진출했던 농구월드컵에서 5전 전패로 예선탈락을 했다. 예견된 결과였지만 당사자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이상이었다. 국내서 최고를 자부하던 이들이었기에 직접 피부로 느낀 세계농구와의 격차를 쉽게 수용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하는 냉정한 현실이었다.
▲ 농구월드컵은 아시안게임 위한 전초전?
남자농구 대표팀은 농구월드컵을 앞두고 한 달 동안 A매치 한 번 치러보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출국했다. 세계최강 미국도 스페인 그란 카나리아에서 슬로베니아와 최종점검을 했다. 현지 평가전은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컨디션 점검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 하지만 한국은 이를 무시한 결과 앙골라와의 첫 판부터 소위 처참한 ‘멘붕’에 빠지게 됐다.
유재학 감독은 “아시안게임보다 농구월드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농구도 이제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국농구를 움직이는 수뇌부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농구월드컵을 아시아게임 우승을 위한 전초전 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다. ‘어차피 전패를 당할 것이니 아시안게임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패배의식이 깔려 있었다. 선수단이 전패를 당하고 돌아온 공항에서 ‘괜히 세계무대에 나가서 분위기만 망쳤다’는 식으로 발언한 관계자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5패를 당하더라도 모든 것을 준비해 자기 기량을 마음껏 펼쳐보는 것과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선수단은 이것저것 해보려고 최선을 다했다. 다만 A매치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한국농구의 무능은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패배를 두고 선수 탓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문제는 반복되고 있다. 아시안게임을 앞둔 유재학호는 외국선수 연합팀과 세 차례 연습경기를 했다. 시즌을 코앞에 두고 소속팀을 구하지 못해 실업자신세인 선수들이었다. 몸이 제대로 만들어져 있을 리가 없었다. 급조된 팀이니 조직력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코치도 없었다.
유재학 감독은 연합팀을 상대로 지역방어와 함정수비를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오합지졸인 팀을 상대로 제대로 연습효과가 나올 리가 만무했다. 심지어 후반으로 갈수록 이들은 체력까지 급격히 떨어졌다. 경기가 끝나자 외국선수들이 뱉은 첫마디는 “돈은 언제 입금되느냐? 약속대로 주는 것이 맞느냐?”였다.
유재학호는 오는 21일 LG와 연습경기를 한다. 그나마 어렵게 구한 연습상대다. 프로팀과 연습경기를 하려 해도 부담스럽다. 주축선수는 대표팀으로 빠진데다 외국선수가 부상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 LG의 주축전력 김종규와 문태종은 대표팀 선수다. 차포를 뗀 프로팀과의 연습도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과연 제대로 된 연습이 될까. 대한농구협회와 KBL은 제대로 된 A매치 한 번 주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일까. 이런 환경에서 무작정 금메달을 기대하는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 필리핀 돌풍의 비결은? 막대한 투자와 관심
한국과 함께 아시아대표로 월드컵에 참가한 이란과 필리핀은 첫 승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승패를 떠나 세계적 강호와 만나 대등하게 싸운 경기내용이 더 훌륭했다. 특히 필리핀의 돌풍을 단순히 NBA센터 안드레이 블라치의 귀화로만 치부할 수는 없었다. 필리핀의 성과는 아시아 2등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로 눈을 돌린 결과물이다.
필리핀의 성공비결로 막대한 투자, 외교능력, 농구에 대한 엄청난 열정 세 가지를 꼽고 싶다.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1조 1975억 달러를 기록하며 세계 15위에 올랐다. 필리핀은 2722억 달러로 41위에 랭크됐다. 객관적 지표에서 한국이 필리핀보다 잘사는 나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투자에서는 정반대다. 필리핀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현역 NBA선수를 귀화시키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월드컵을 앞두고 한 달 전부터 미국과 유럽을 돌며 전지훈련을 떠났다. 월드컵에서 36년 만에 승리를 거두자 선수들에게 막대한 포상금을 지급했다. 필리핀은 투자 없이 결과도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세계농구에 미치는 영향력에서도 필리핀은 한국을 앞섰다. 안드레이 블라치의 인천 아시안게임 출전이 어려워지자 필리핀은 패트릭 바우만 국제농구연맹(FIBA) 사무총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바우만은 직접 인천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LOC)에 친필 서한을 보내 블라치의 출전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OCA 규정에 위배된 블라치는 최종적으로 뛸 수 없게 됐다. 다만 필리핀 농구계가 가진 외교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필리핀은 국제농구에서 가장 영향이 큰 인물을 자기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국제대회서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보지 못하는 한국과 큰 차이점이다.
지난해 대한농구협회와 한국프로농구연맹(KBL)은 귀화선수 영입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하지만 구체적 방안을 놓고 차일피일 미루며 끝내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까지 나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던 필리핀 농구계와는 사뭇 다른 행정처리였다.
필리핀의 힘은 결국 국민들이 농구를 엄청나게 사랑하기 때문에 발휘될 수 있다. 농구를 국기로 삼은 필리핀은 프로농구 친선전에 1만 5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인다. 농구월드컵에서 가장 열성적인 응원을 펼친 이들도 바로 필리핀 팬들이었다. 16년 만에 출전한 농구월드컵이 TV로 제대로 중계조차 되지 않는 한국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열기다. 국내서 찬밥신세인 농구인기를 감안하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시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세계선수권에는 1군이 가야한다
여자농구의 경우 1군으로 구성된 아시안게임 대표팀과 2군 격인 세계선수권 대표팀으로 이원화됐다. 두 대회의 일정이 겹쳐 이원화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다만 아시안게임 주최국에서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생각으로 1군이 아시안게임에 나간다.
하지만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란 눈앞의 가시적 성과를 위해 우리나라 최고선수들이 세계최고선수들과 경쟁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라이벌 중국과 일본은 세계무대를 우선시했다. 세계선수권에 참가하는 그들은 아시안게임에 사실상 2진을 내보낸다. 세계적 강호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면 아시아권에서는 당연히 선전할 수 있다. 결국 더 큰 무대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값지다. 다만 라이벌 2진들을 물리치고 따내면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세계선수권에서 경쟁할 기회는 아시안게임 메달색깔보다 소중할 수 있다.
위성우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은 “세계농구를 많이 접해야 도움이 많이 된다. 일본은 유럽을 돌고 미국과도 경기를 한다. 우리도 체코에 나갔다가 와보니 도움이 많이 됐다. 우리도세계대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 세계농구를 접해야 선수들이 발전한다”고 털어놨다.
김영주 세계선수권 대표팀 감독 역시 “우리도 캐나다와 해봤다. 자꾸 세계무대를 경험해야 한다. 높이 낮다고 피하지 말고, 부딪치다보면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다. 세계선수권에 가서도 도망가지 않아야 한다. 젊은 선수들이니까 몸싸움에 신경을 쓰고 있다. 승패보다 경험을 해봐야 한다. 기술을 발휘해본다면 해외서도 잘할 것”이라고 동의했다.
남녀대표팀 모두 차세대 선수들을 어떻게 키우겠다는 확실한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지 않다. 특히 여자대표팀의 경우 30대 중반 선수들이 아직도 주축이다. 이들이 은퇴했을 때 대표팀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
▲ 유재학호, 비난보다 격려가 필요할 때
한국은 농구월드컵에서 처참하게 졌다. 하지만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농구의 흐름을 파악하고, 부딪쳐보고 왔다는 것만 해도 적어도 ‘우물 안 개구리’는 벗어났다. 유재학 감독은 “이번에 가서 FIBA와 세계농구가 어떤 흐름을 추구하고 있는지 배우고 왔다. 몸싸움이 전쟁 수준이었다. 서로 몸을 부딪치는 격렬한 소리가 날 정도였다. 한국농구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고 토로했다.
문제점을 알면 고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KBL은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다음 시즌부터 FIBA룰을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똑같은 심판들이 갑자기 강도 높은 몸싸움을 허용할 수 있을지는 매우 회의적이다. 아마추어 선수들 역시 과도한 몸동작으로 파울을 얻는 것이 일반화돼있다.
한국이 농구월드컵에서 5연패를 당하자 팬들의 수위 높은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국제적 망신이다’, ‘그럴 거면 안 나가는 것이 나았다’, ‘고액 연봉을 받을 자격이 없다’며 특정선수를 비난하는 댓글도 많았다. 하지만 과연 국가대표 선수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유재학호는 지난 5월부터 4개월 동안 손발을 맞추고 있다. 국가를 위해 개인과 소속팀의 손해를 모두 감수했다. 기자도 여러 차례 진천선수촌을 방문해 이들을 관찰했다. 연봉이 높다고 요령을 부리는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누구보다 태극마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선수들이다.
농구월드컵 결과에 누구보다 실망한 이는 선수들이었다. 국내최고를 자부하는 이들이 “농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고 왔다. 아시안게임 출전을 앞둔 대표팀은 분위기를 추스르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도 후유증이 시달리고 있다. 어느 때보다 팬들의 진정성 있는 응원이 필요할 때다.
거시적으로 보면 월드컵 참패의 궁극적 원인은 한국농구 시스템의 한계였다. 지금까지 제도권 하에서 길러낸 최고의 선수들이 세계무대에는 통하지 않았다. 특정 선수의 잘못이 아닌 한국농구 선수육성 환경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대표팀에서 에이스 역할을 한 문태종의 경우 미국농구가 길러낸 선수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이제 유재학호는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도전한다. 금메달을 못 따도 걱정이고, 따도 문제가 생긴다. 못 딴다면 참담한 분위기가 그대로 프로농구로 이어질 수 있다. 가뜩이나 저조한 인기의 프로농구는 새로운 시즌 개막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가운데 중계방송 계약과 타이틀 스폰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인천 아시안게임 성적은 여기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금메달을 따면 한국농구 수뇌부들이 ‘세계와 담을 쌓고 지금처럼 하면 된다’는 매너리즘을 깨지 못할까 걱정이다.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바뀌면 세계무대에서 느끼고 온 경험과 노하우는 다음 세대에 전해지지 않게 된다. 한발자국 앞으로 갔던 한국농구가 다시 제자리 걸음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한국농구가 발전하려면 이제는 세계를 봐라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