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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명예의 전당 헌액식 거행
출처:루키|201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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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한국시간) 스프링필드 심포니 홀에서 ‘2014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식이 열렸다. 오랜 기간 NBA를 이끌어 온 데이비드 스턴 전임 총재를 비롯해 많은 농구계 인사들이 가문의 영광을 누렸다.


공헌자

데이비드 스턴

NBA를 세계화 시킨 장본인. 단일국가의 프로리그에 불과했던 NBA를 글로벌 스포츠로 만든 일등공신. 1984년 NBA의 커미셔너로 부임한 이후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만 30년이 되던 2014년, 아담 실버 차기 총재에게 자리를 넘긴 후 옷을 벗었다.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등의 소개로 단상에 오른 스턴은 "내가 이 자리에 올 수 있던 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다. NBA의 미래는 대단히 밝다. 비범한 리더십을 지닌 아담 실버 총재와 함께 화려하게 번창할 것"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나다니엘 클리프튼

"스윗 워터"라는 별명을 지닌 나다니엘 클리프튼은 NBA와 계약을 맺은 첫 흑인 삼총사 중 한 명이었다. 50여년 전 스포츠계에 팽배했던 인종차별의 벽을 허무는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90년 8월 31일 사망했고, 흑인 운동선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바 있다.

통산 성적은 10년 간 10.0점, 8.2리바운드. 1957년 올스타전에서는 8점, 11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자비어 대학 역사상 한 경기 최다 야투 성공(21개)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코치

밥 레너드

ABA 역사상 최다승을 기록했던 명감독. ABA 통산 387승 270패를 기록, 통산 58.9%의 승률을 기록했다. 1970, 1972, 1973년 무려 세 차례나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ABA 챔피언으로 이끌기도 했다. 1969년과 1975년에도 결승전에 올랐으나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 바 있다.

페이서스가 기록한 세 차례의 우승, 2년 연속 우승 등은 ABA 역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또, 레너드는 플레이오프 166경기에 출전, 69승을 따냈는데 이는 모두 ABA 역대 최다 기록이라고 한다. 다른 감독들은 레너드를 가리켜 "7차전 승부 최고의 감독"이라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놀란 리차드슨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학농구 최고의 감독 중 한 명. 1990, 1994, 1995년 아칸소 대학을 이끌고 ‘파이널 포‘에 진출했으며, 1994년에는 챔피언십을 거머쥐고 ‘올해의 감독‘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감독 생활 통산 509승 207패, 무려 71.1%의 승률을 올렸다.

게리 윌리엄스

NCAA의 명장. 1990년부터 2011년까지 메릴랜드의 감독으로 활약했다. 1994년부터 2004년까지 11년 연속 NCAA 토너먼트 무대를 밟았다. 2002년에는 후안 딕슨, 로니 벡스터, 스티브 블레이크 등과 함께 대학농구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통산 승률은 63.7%(668승 380패).




이마쿨라타 유니버시티

여자대학농구 역사상 최고의 팀 중 하나. 1972년부터 내리 3년간 AIAW(NCAA가 남자농구만 운영되던 시절, 이와 동등한 가치를 지녔던 대학여자농구협회) 챔피언에 등극했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시 3년 간 기록한 성적이 무려 60승 2패라는 점이었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펼쳤던 경기는 전파를 탔는데, 이는 여자대학 팀의 경기가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된 최초의 사례가 됐다. 테레사 생크, 마리안 크포포드, 메리 샤르프 등 스타 플레이어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들 세 명 모두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바 있다.


선수 부문

사루나스 마르셜리오니스

리투아니아 출신 농구선수. 1980-90년대 NBA 무대에서 유럽 선수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네 차례나 ‘올해의 스포츠맨‘으로 선정되었고, 1991년에는 FIBA가 선정한 "역대 가장 위대한 50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1995년에는 유로피안 챔피언십 MVP를 거머쥐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더 이룰 것이 없는 최고의 선수였지만 NBA에서는 달랐다. 7년을 뛰며 평균 12.8점, 1.3스틸을 올렸다. 1991-92시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는 평균 29.4분을 소화하며 18.9점을 올리는 등 벤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낸 바 있다.


가이 로저스

1950년대 후반 대학농구 최고의 선수 중 한 명. 평균 19.6점을 올리며 템플 대학 역대 1위에 올라 있다. NBA 진출 이후에는 네 차례 올스타전에 나서는 등 스타 플레이어로서 활약했다. 프로 통산 기록은 11.7점, 7.7어시스트. 1963년과 1967년에는 각각 평균 10.6, 11.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전체 1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2001년 2월 19일 타계했다.


알론조 모닝

NBA 역사상 최고의 수비력을 지녔던 센터 중 한 명. 1999, 2000년은 알론조 모닝의 기량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당시 샤킬 오닐과 함께 리그 최고의 센터를 양분했다. 1999, 2000년 두 시즌 연속으로 ‘올해의 수비수‘로 선정되며 전성기를 누렸다. 208cm로 센터 포지션 대비 크지 않은 신장이었지만 긴 팔과 뛰어난 위치 선정 능력, 슛 타이밍을 읽는 눈 등을 앞세워 블록슛에 대단히 능했다.

1994 농구 월드컵의 주축 멤버로 활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미국 대표팀이 우승하는데 일조했다. 2006년에는 마이애미 히트 소속으로 NBA 우승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통산 7차례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등 많은 인기를 누린 빅맨이었다. 2000년 신장병에 걸려 거의 모든 능력을 잃은 것이 안타깝다.


미치 리치먼드

한때 마이클 조던이 "슈팅 만큼은 나보다 낫다"고 찬사를 보냈던 명품 슈팅가드. 공격은 물론 수비에도 능해 "The Rock"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0년대를 수놓은 스윙맨 중 한 명이다. 1989년 ‘올해의 신인상‘을 거머쥐며 혜성같이 등장한 이후, 통산 여섯 차례 올스타, 세 번의 올-NBA 세컨드 팀, 두 차례 서드 팀에 들었다.

데뷔 이후 10년 연속 평균 20점을 넘길 정도로 뛰어난 득점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레지 밀러, 글렌 라이스, 크리스 멀린 등과 함께 1990년대 최고의 슈터로 각광 받았다. 통산 평균 21.0점, 3.9리바운드, 3.5어시스트, 3점슛 성공률 38.8%를 기록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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