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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실수 극복한 '신인' 마이클 조던
출처:손대범 칼럼|201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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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하지 않는 자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영국 속담이 있다.

1983년에 작고한 전설적인 미식축구 감독 폴 ‘베어‘브라이언트(Paul Bear Bryant)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것을 만회하려면 실수를 인정하고, 그것으로 배우고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프로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의 첫 시즌은 외로움과 실수라는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농구선수로서는 자신의 성공 가능성을 美 전역에 알리면서 시카고 프랜차이즈에 전환점을 제공했지만, 사회에 갓 나온 초년병으로서는 잊지 못할 경험을 많이 한 시기로 평가된다.

외로운 싸움

 

 

조던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1984년 올림픽에서의 성공은 조던을 한 단계 더 올려줬으며, 그 기량은 트레이닝캠프에서부터 빛났다. 연습 첫 날부터 종횡무진 코트를 누비며 케빈 로거리 감독과 코칭스태프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1985년 1월에 발행된 농구잡지 HOOP은 로거리 감독이 이미 트레이닝캠프 때부터 조던 위주의 전술을 고안했을 정도라고 그 분위기를 전했다.

야구단 시카고 컵스의 플레이오프 진출 때문에 한동안 불스 코트에는 발길을 끊었던 기자들도 소문을 듣고선 훈련장을 찾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조던을 ‘제2의 줄리어스 어빙‘으로 표현했다. 어빙은 조던의 어릴 적 우상인 데이비드 탐슨처럼 우아하게 하늘을 날며 자유자재로 기술을 펼칠 수 있었던 선수였다. 또한 흑인농구선수들이 존경받지 못하던 그 시절, 롤-모델로서도 입지를 굳힌 몇 안 되는 스타이기도 했다. 로거리 감독은 이러한 비교가 조던에게 부담이 될까 걱정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비교는 조던에게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며 그 관심을 견제했다.

그러나 조던에 대한 관심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인위적으로는 더 이상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스포팅뉴스(Sporting News)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던에게 의사 가운을 입힌 채 ‘NEXT DR.J‘라는 문구를 박아 내보냈다(조던은 이 컨셉트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조던은 세간의 평가에 우쭐해지지 않았다. 첫날부터 그는 개인기량 연마에 집중했는데, 특히 자신의 약점인 슈팅을 개선하기 위해 따로 훈련을 하기도 했다. 로거리 감독은 보조를 자원해 차기 에이스의 기량 향상을 도왔다. 이때 함께 한 시간 덕분일까? 조던은 훗날 가장 기억에 남는 코치로 로거리를 꼽았다.

이 인터뷰는 1992년 플레이보이(PLAYBOY)와 나눈 것으로, 질문자도 딘 스미스나 필 잭슨, 덕 콜린스 등을 예상했는지 의외의 답변이 돌아오자 ‘WHY?‘라고 되물었다.

"로거리 감독님은 내가 NBA에서도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신 분이다. 내가 신인이었을 때 그는 볼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봐 애송이, 난 네가 잘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 어디 한번 실력을 보여줘.‘ 감독님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선수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만들어갈 기회를 주셨고, 이를 통해 자신감을 쌓아가길 바라셨다. 다른 감독들과는 달랐던 점이다. 대개는 자신의 시스템에 맞춰가길 바라기 때문이다. 지금은 로거리 감독님이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신인 선수 입장에서 감독의 전폭적 지지만큼 든든한 게 또 있을까? 하지만 첫 시즌은 조던이 생각했던 것처럼 순탄하게 흘러가진 않았다. 선배들은 조던을 탐탁치않아 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시즌이 시작되면 금방 연습을 그만둘 것‘이라며 내기까지 했었다. 분명 시즌 중반쯤 되면 제 풀에 지쳐서 그만둘 것이라며 말이다. 시카고에는 올랜도 울릿지나 퀸틴 데일리 같은 재능 있는 선수가 많았지만, 그들은 자존심만 강했을 뿐이었다. 데일리는 감독의 지시에도 불응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한번은 구단 관계자가 팀 규정에 맞춰줄 것을 요구하자, "난 길거리에서 내 방식대로 살아왔지만 그래도 여기(NBA)까지 온 선수다. 날 막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는 조던을 도전자이자 경쟁자로 받아들였다.

1984년 당시 불스의 핵심멤버였던 데이브 코진의 인터뷰는 둘의 관계를 상상하게 해준다. "초창기 조던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경쟁 상대가 아니었나 싶다. 퀸틴도 꽤 좋은 선수였다. 다만 자기관리가 안 되다보니 농구로 성공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실제로 데일리도 능력 있는 선수였다. 조던의 공식 데뷔전이었던 워싱턴 불레츠전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넣은 선수는 바로 데일리였다. 그는 4쿼터 12득점을 포함해 25득점을 기록했다.

다만 패배에 물들고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점이 문제였는데, 불행히도 이는 불스 팀 라커룸에 만연한 하나의 풍조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1985년에 취임한 제리 크라우스 단장도 "단장으로 취임했을 때 불스 멤버 중 지키고 싶었던 선수는 조던을 포함해 겨우 셋뿐이었다(다른 둘은 코진과 로드 히긴스였다). 나머지는 다 처분하고 싶었는데 그 마저도 쉽지 않았을 정도였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조던은 물들지 않았다. 은퇴할 때까지도 농구를 대하는 자세가 바뀌지 않았다. 팀 동료 시드니 그린은 첫 시즌을 넘길 무렵에 ‘MJ가 진리(truth)다‘라며 혀를 내둘렀다. 자신들의 내기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조던은 선배들의 텃세를 가볍게 넘겼다. 아예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한번은 원정 연전 중 선배들로부터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코카인과 마리화나를 흡연하는 모습을 보고선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후문이다.

조던도 선배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난 뒤 저술한 자서전 Driven From Within에서는 "난 올랜도 울릿지나 퀸틴 데일리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찌 보면 난 그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온 입장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누구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조던의 이러한 묵묵함은 당시에는 미움을 샀지만, 훗날에는 당사자들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올랜도 울릿지는 "이제야 말하지만, 그때 우리는 마이클 잭슨의 투어를 다니는 것 같았다. 팬들의 열기가 대단했고, 경찰의 에스코트도 끊이지 않았다. 물론 마이클 조던 때문이었다. 그는 마이클이었고, 우린 그저 잭슨(Jacksons) 같이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분위기를 바꾸다

 

 

조던은 지독한 경쟁자였다. 지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한번은 당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갚아주었다. 많은 이들이 조던을 자극했다가 큰 코를 다쳤다.

케빈 로거리 감독이 공개한 일화도 있다. 자체 청백전 중 조던의 팀이 8-0으로 앞서가자, 로거리 감독은 경기를 중단시키고 조던을 지고 있던 팀으로 재배치했다. 조던은 불같이 화를 냈지만 로거리 감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조던이 새로 배치된 팀은 10-8로 앞선 채 경기를 마쳤다. 이처럼 조던이 경쟁을 즐길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바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이기고 싶다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포기를 몰랐다. 동료들이 자신의 뜻을 함께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긴 말은 하지 않았다.

NBA 은퇴선수협회(NBRPA)의 도움을 받아 NBA 해설자 스티브 커와 이 부분에 대해 이메일 서신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현역시절 마이클 조던과 3번 우승을 함께 했던 커는 "조던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선수였다. 지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대단히 강했다. 몸소 리더십을 보여줬던 선수였다. 하지만 동료들에게는 모질 게 대할 때가 많았던 리더였다"라고 회고했다.

신인 시절 조던은 비록 앞장설 수 없는 처지였지만, 팀이 그대로 패하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은 그때도 같았다. 2006년 시가 어피셔나도(Cigar Aficionado) 잡지와 가진 1대1 인터뷰에서의 코멘트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데뷔 후 3번째 경기였다. 상대는 밀워키 벅스였고, 우린 16점을 지고 있었다. 그러자 팬들이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집에 가더라. 무척 당황했다. 모두들 경기가 끝났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런데 선수들 대부분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분위기였다. 난 그런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스코어보드의 시계가 0:00이 되기 전까지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시카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가 이기든 지든 포기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내 첫 시즌은 그랬다. 그런 노력 끝에 플레이오프 진출도 달성해 너무나도 기뻤다."

조던의 말처럼, 불스는 패배에 익숙한 ‘도어메트 팀(doormat team)‘이었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도어메트는 ‘다른 사람에게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스포츠에서는 ‘매번 무기력하게 져서 다른 팀 승수 쌓기의 발판이 되는 팀‘정도로 볼 수 있겠다. 조던이 데뷔하기 바로 이전인 1983-84시즌에 불스는 27승 55패에 그치면서 세 시즌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평균득점은 102.4점이었는데, 실점은 무려 107.5점이었다. 한 시즌에 55번이나 지다보니 의욕이 생길 리가 없었다. 조금만 점수차가 벌어져도 선수들은 포기했다.

그러나 조던의 데뷔 후 이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앞서 조던이 말했던 자신의 3번째 경기(1984년 10월 29일, 밀워키 전)에서 불스는 4쿼터 16점차를 극복하고 116-110으로 이겼다. 이 경기에서 그는 무려 37득점을 올렸다. 탄력을 받은 불스는 다음 6경기에서 5승을 챙겼고, 시즌을 7승 2패로 시작할 수 있었다. 원정 5연전이라는 고된 일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분투였다.

데뷔전을 비롯한 시즌 초반 경기들은 조던에게 몇 가지 숙제를 남겼다. 가장 중요한 숙제는 바로 조화였다. 그 조화는 선배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정상적인 공격 옵션으로 자리잡아야 가능한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그 숙제는 동료들이 도와줬다. 마치 조던의 해결사 능력을 육감적으로 느낀 듯, 승부처가 되면 자연스럽게 조던에게 볼이 가기 시작했다.

11월 13일, 홈에서 열린 샌안토니오 스퍼스전이 대표적이었다. 여전히 올랜도, 퀸틴과의 공조는 잘 이뤄지지 않았지만 승부처가 되자 번갈아 ‘빅 샷‘을 터트리며 분위기를 바꿔왔다. 조던 역시 NBA 프로농구에 완전히 적응한 듯, 볼 유무와 관계없이 코트를 휘젓고 다녔다.

당시 조던을 이용한 대표 전술은 코트 반대쪽에서 기습적으로 스크린을 받고 나와 공을 잡는 것이었다. 조던은 몇 차례 속임 동작으로 수비를 떨군 뒤 코진의 스크린을 타고선 수비의 방해 없이 자신의 공격 찬스를 잡는데 성공했다. 전반내내 슈팅감각이 살아나지 않아 애먹긴 했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족족 슈팅을 성공시켰다. 이 경기 4쿼터에서 그가 올린 점수는 16점이었다. 특히 좌측 중장거리(5.5~6.5m)에서 세 차례 점프슛을 성공시켰는데, 평소 점프슛이 약점으로 꼽혔던 조던이기에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던은 마치 ‘이게 내 약점이라고?‘라며 항변하는 듯 했고, 그 사이 시소를 타듯 아슬아슬하게 주고받던 경기 흐름은 완전히 불스쪽으로 넘어왔다. 밀워키 전에서 기록했던 개인최다 37점도 넘어섰다. 39점째를 올리자, 시카고 스태디움의 관중들은 기립박수로 슈퍼 루키의 새 기록 달성을 축하했다. 조던은 결정적인 리바운드를 잡아 단독 속공까지 성공시켰고, 이로써 불스는 승부를 결정(120-117)지을 수 있었다.

이날 그는 3쿼터까지 올린 29점을 더해 데뷔 후 최다득점인 45점을 기록했다. 경기 후 올림픽 대표팀 동료이자, 샌안토니오 소속으로 뛰었던 앨빈 로벌슨은 경기 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조던은 마치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 같았다.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조던은 12월 7일 뉴욕 닉스전에서 5초를 남기고 위닝샷을 터트려 95-93의 짜릿한 승리를 선사하는 등 84-85시즌에만 4번의 위닝샷을 터트렸다. 찬사는 계속됐다. LA 레이커스의 명수비수, 마이클 쿠퍼는 "막을 방법이 없는 선수"라 말했고, 피닉스 선즈의 마케팅 이사 하비 생크는 "피닉스 팬들이 원정팀 선수를 보려고 기다린 건 줄리어스 어빙 이후 처음이다"라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이러한 찬사에도 불구하고 소속팀은 연승과 연패를 되풀이했다. 11월을 9승 9패로 마쳤던 불스는 1월 마지막 날까지도 24승 22패로 5할 승률을 유지했지만, 이후 10경기에서 2승 8패로 무너지면서 처지기 시작했다. 불스는 조던, 올랜도, 퀸틴이라는 좋은 득점원을 보유한 반면 인사이드와 수비 조직력은 엉망이었다. 골밑에서 스티브 존슨이 버텨줬지만, NBA 정상급 파워포워드들과 비교하면 급이 떨어졌다. 센터 포지션의 코진이나 칼드웰 존스도 인사이드 경쟁력은 많이 부족해 강팀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리바운드와 수비 문제가 대두됐다.

그렇다고 조던에게 문제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의 슈팅은 상대가 전략적으로 파고들 가치가 있는 약점이었다. 몇몇 팀들은 조던이 영점 조준을 맞춘 지도 모르고 계속 거리를 두다가 호되게 당하기도 했지만, 영리한 팀들은 적절히 그를 떼어놓으며 돌파를 유도하기도 했다. 데니스 존슨이 매치업 상대로 나섰던 보스턴 셀틱스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벌려뒀다. 어차피 먼거리 슈팅은 성공률이 떨어지니 던지도록 하고, 대신 리바운드를 강화한 것이다. 행여 조던이 돌파를 시도하면 케빈 맥헤일과 로버트 패리시가 몸으로 막아냈다. 래리 버드와 대니 에인지 등의 존재도 조던에서 파생되는 공격을 둔화시켰다.

훗날 로드 쏜 단장은 조던의 약점에 대해 언급했다. "그때 조던은 돌파가 주무기였다. 슛은 없었다. 하지만 영리했다. 스스로 약점을 알고 슛 연습에 매진했다. 언젠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곧 점프슛도 익힐 겁니다‘라고…. 그러더니 결국 해냈다. 하지만 드래프트 때만 해도 그에게는 슛이 약점이었다. 우리도 반문했다. ‘과연 저 친구가 슛을 던질 수 있을까?‘라고."

잊지 못할 실수

1985년 2월 10일, 인디애나폴리스의 후지어돔(Hoosier Dome)에서 열린 NBA 올스타전은 조던에게 많은 사건을 만들어준 이벤트였다. 조던은 신인임에도 불구, NBA 올스타전에 주전으로 출전했다.

1980년대는 훌륭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된 시기였던 만큼 신인들의 진입장벽이 높았다. 1980년 보스턴 돌풍을 일으킨 래리 버드는 첫 해 올스타 투표에서 동부 포워드 중 4위에 그쳤고, 주전으로 발탁되기까지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83년 슈퍼루키 제임스 워디도 포워드 중에서는 5위권 밖이었다. 워디의 첫 올스타전은 1986년에야 이뤄졌다.

그나마 매직 존슨과 아이재아 토마스 정도가 신인 때부터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스타들이었다. 매직은 1980년에 185,754표로 서부 컨퍼런스 팬 투표 선두(NBA 전체 2위)를 달리며 서부 올스타 주전선수로 나섰고, 토마스는 신인이었던 1982년에 래리 버드에 이어 전체 3위(367,969표)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조던도 두 선수의 길을 따라갔다. 팬 투표에서 606,193표를 획득하며 당당히 동부 컨퍼런스 주전선수로 떠올랐다. 줄리어스 어빙, 래리 버드보다도 많은 표였다(1985년 팬 투표 1위는 매직 존슨으로 957,447표를 얻었다). 그 뒤 NBA에서 신인선수가 올스타전에 주전으로 나서기까지는 8년이 더 걸렸다.

신인으로서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운 조던은 올스타전 현장에 나이키 점퍼를 입고 등장했다. 목에는 금색체인을 걸친 채 말이다. 모두가 NBA 공식 의상을 입은 가운데, 조던만 튀었다.

그러자 선배들은 조던을 외면했다. 아니, ‘외면‘이란 단어는 약하다. 뒤에서 수군댄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경기 중에도 그에게 패스를 잘 해주지 않았다. 결국 22분간 9개의 슈팅을 던지는데 그쳤다. 동부 올스타 중에서는 가장 적은 시도였다. 득점도 7점에 불과했다.

조던은 이때를 농구인생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순간이라 고백했다.

나이키 점퍼를 입는 것은 에이전트 데이비드 포크의 아이디어였다. 조던은 "정규경기가 아니라서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고 해명했지만, 이미 ‘건방진 신인‘으로 낙인찍힌 뒤였다. 이 일화에 대해 조던은 수차례 해명을 했는데, 1994년에 출간된 시카고 지역기자 밥 그린(Bob Greene)의 ‘Hang Time‘이 가장 진솔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나에게 ‘성공‘은 좋은 자동차와 보석에 모피 코트를 의미했다. 나는 첫 시즌부터 돈도 잘 벌었고, 경기도 잘 했다. 그래서 일이 잘 될 때 누구나 생각하는 것을 나도 생각했다. 러시아산 너구리 털코트를 샀고 목걸이와 팔찌를 걸쳤다. 물론, 그러면서도 나도 ‘이게 내 진짜 모습은 아닌데‘라는 인식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흔히 성공한 프로선수의 외관과 복장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나는 성공한 NBA 신인이라 과시하는 것이라 여겼다. 나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몰랐기 때문에 흉내를 낸 것이다. “

"언제 잘못됐다고 생각했나?"

"신인으로서 올스타에 출전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나이든 선수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건방지고 태도가 안 좋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내가 해온 행동은 그들을 따라한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기 중에 내개 공을 주지도 않았고 그런 얘기만 들려주었다. 난 마음이 아팠다. 아무 것도 몰랐다. 고등학교에서 상급생 흉내를 내려는 하급생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나 스스로도 그것이 내 모습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흉내를 그만두었다. 사실은 모피코트나 보석류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건 많은 올스타전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조던은 아이재아 토마스가 자신을 따돌렸다고 생각했다. 비단 올스타전 경기 중에 일어난 ‘노 패스‘ 사건만이 아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토마스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토마스는 이를 무시했다고 고백했다. 기분이 상한 조던은 로거리 감독에게 이 일을 전하며 자신의 기분을 설명했는데, 공교롭게도 올스타전 바로 다음 경기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의 홈 경기였다. 스스로 ‘복수전‘이라 말한 이 경기에서 조던은 49득점을 폭발시켰다. 경기도 가져갔다. 불스는 연장전 끝에 139-125로 이겼다. 조던은 토마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어쩌면 ‘조던 룰(Jordan Rule)‘로 대변되던 디트로이트와 시카고의 라이벌 관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선발을 둘러싼 음모론 등 토마스와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의미있는 마무리

 

 

조던의 첫 시즌은 38승 44패로 막 내렸다. 최종순위는 7위. 마무리가 좋았다면 순위는 더 좋아졌을 지도 모른다. 6위팀 워싱턴 불레츠(40승 42패)와는 겨우 2게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순위가 바뀌었다고 해서 불스의 운명이 달라졌을 지는 의문이다. 1984년 NBA 사무국은 플레이오프 진출팀을 기존 12팀에서 16팀(동부 8팀, 서부 8팀)으로 바꾸면서 대진표도 손질을 가했다. 1라운드를 5전 3선승제로 바꾸었고, 각 컨퍼런스별 1위와 8위, 2위와 7위, 3위와 6위, 4위와 5위가 맞붙게 했다. 이에 따라 7위였던 불스는 2위팀과 맞붙게 됐다. 

만약 불스가 6위가 됐다면 3위와 경기를 했겠지만, 6위든 7위든 그들이 1라운드에서 상대할 팀은 모두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기에 최종결과에는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동부 2위 밀워키(59승 23패)나 3위 필라델피아(58승 24패)도 한 끗 차이로 순위가 바뀐 처지였으니 말이다.

벅스는 시카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 연고를 두고 있는 팀으로, 공수 양면에서 상대하기가 꽤 까다로운 팀이었다. 혹자는 두 도시의 관계를 ‘라이벌‘로 표현하지만, 불스 입장에서 봤을 때는 ‘숙적‘이라 표현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조던조차 훗날 밀워키를 회고할 때 "밀워키 벅스는 너무나 강한 팀이었다. 항상 우리에게 이겼다. 플레이오프에서조차도 그들을 넘지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돈 넬슨 감독이 이끌던 밀워키는 1983년과 1984년에 연이어 동부 결승에 올랐으며, 꾸준히 6할 이상의 성적을 거둬오던 강호였다. 그 원동력은 전체 1위에 빛나는 강력한 수비에 있었다. NBA에서 수비를 제일 잘 한다는 사람만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에만 두 명이 올랐다. 시드니 몽크리프와 폴 프레시가 바로 그들이다. 공격에서는 테리 커밍스가 위용을 뽐냈다. 85년 플레이오프 당시 NBA 데뷔 3년차였던 커밍스는 23.6득점 9.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밀워키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선수였다. 

불스의 첫 과제는 밀워키 홈에서 열리는 1,2차전 중 하나를 잡는 것이었다. 정규시즌 전적이 3승 3패로 대등했기에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팀과 집중적으로 연전을 치르는 플레이오프가 주는 무게와 부담감은 정규시즌과는 많이 달랐다. 불스는 원정경기 성적이 12승 29패로 최악의 수준이었고, 조던에 대한 집중수비가 이뤄지는 터라 이 역시도 쉽지가 않았다. 선수들의 플레이오프 경험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다. 결국 노련미와 수비에서 앞선 벅스는 1,2차전에서 109-100, 122-115로 불스에 이겼다.

3,4차전은 4월 24일 시카고로 장소를 옮겨져 치러졌다. 불스가 이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1,2차전에서 26.5점을 기록했던 조던이 더 점수를 많이 올려주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조던도 이때는 신인일 뿐이었다. 최고의 수비팀을 상대로 혼자 드라이브인을 시도하다 볼을 놓치거나, 트래블링 바이얼레이션에 걸려 공격권을 넘겨주기도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혼자 볼을 잡고 움직이기보다는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조던에게 집중되는 수비를 분산시켜야 했다. 또 수비에서 집중력을 살려 반전을 노려야 했다. 다행히 3차전에서는 이것이 잘 됐다.

전반에 16점을 기록했던 조던도 후반들어 더 힘을 냈다. 마침 그를 막던 몽크리프가 파울트러블에 걸린 상태였다. 3쿼터에 그는 몽크리프와의 1대1 대치상황에서 볼을 가로채고 올랜도에게 기가 막힌 패스를 전달하며 경기 흐름을 뒤집었다. 당대 최고 수비수로 꼽히던 몽크리프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조던은 4쿼터 마지막 7분 동안에만 13점을 쏟아 부으며 승리를 주도했다. 최종 점수는 109-107. 1981년 이후 불스가 거둔 첫 플레이오프 승리였다.

조던은 35득점 7어시스트 8리바운드라는 우수한 기록을 남겼다. 불스는 이틀 뒤 열린 4차전에서도 여세를 몰아가고자 했지만 시리즈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4차전에서 조던은 29점을 올렸지만 동료들의 지원 부족으로 97-105로 패했다. 20초를 남기고 102-97까지 따라붙었지만, 남은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렇게 조던의 생애 첫 플레이오프 시리즈는 1승 3패로 종결됐다.

비록 기록지에는 ‘LOSE(패배)‘ 를 뜻하는 ‘L‘이 새겨진 채 시즌을 마쳤지만, 조던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시즌이었다. 먼저 하킴 올라주원보다 늦게 드래프트에 지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신인상을 수상했다. 올라주원의 휴스턴 역시 이전 시즌보다 19승이나 많은 48승을 올리며 2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또 그 역시 20.6득점 11.9리바운드 2.7블록으로 선전했지만 조던의 임팩트에는 미치지 못했다.

조던은 전 경기에 출전해 28.2득점 6.5리바운드 5.9어시스트 2.4스틸로 활약했다. 3,144분은 시카고 구단 역사상 최다 출전시간이었고, NBA 전체를 따지면 3위였다. 시즌동안 기록한 2,313득점 역시 시카고 구단 역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리그 전체에서도 전체 1위였지만, 득점상은 평균으로 따졌기에 버나드 킹에게 양보해야 했다. 버나드 킹은 무릎 부상 때문에 겨우 55경기에 출전해 1,809점에 그쳤지만 평균 득점은 32.9점으로 전체 1위였다(조던은 3위).

조던은 33경기에서 30득점 이상을 기록했고, 74경기에서 20득점을 넘겼다. 기록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트리플-더블은 3번 기록했고, 20득점-10어시스트 기록도 8번이나 남겼다. 시카고 구단 신인사상 최다 기록이다. 하지만 조던의 임팩트는 단순히 기록만으로 정리할 수가 없다. 그 놀라운 움직임은 동료 뿐 아니라 기자와 관계자까지도 감탄시켰고, ‘암흑기‘에 빠졌던 시카고 구단 역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광고 협찬이 붙기 시작했고, 새 시즌 시즌티켓을 문의하는 팬들도 늘었다. 83-84시즌에 26만 명을 동원(전체 21위)하는데 그쳤던 불스 구단은 관중동원에서도 10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조던의 루키시즌에 대해 당시 래리 버드는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 이 시점만 놓고 봤을 때, 조던은 그 당시의 나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냈다. 난 신인일 때 저 정도까진 못했다. 조던이 돌파를 시도할 때였다. 오른손에 볼을 들고 떴는데, 잠깐 팔을 내리더니 다시 올려 득점을 시도하더라. 난 손만 들고 서 있다가 반칙을 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그 친구는 득점을 성공했다. 이 모든 과정이 다 조던이 공중에 떠있는 동안에 이뤄진 일이었다. 조만간 시카고 스태디움은 조던을 보려는 팬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래리 버드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했던 것 같다.

참고 자료
(1) Beckett Publications - MICHAEL JORDAN, 1997
(2) How To Be Like Mike - Pat Williams, 2001
(3) MICHAEL JORDAN - Bill Gutman, 1999
(4) Cigar Aficionado - One on One with MICHAEL, 2006.8.1
(5) rare AIR - Mark Vancil, 1993
(6) PLAYING for KEEPS, David Halberstam, 1999
(7) PLAYBOY, 1992
(8) SLAM - 100% MIKE, 1997
(9) Chicago Breaking Sports, 2010.11.10
(10) Chicago Tribune, 1984~1998
(11) DRIVEN FROM WITHIN, Michael Jordan, 2005
(12) Jumpball.co.kr, 2007.1.5
(13) ESPN ‘마이클 조던 63득점‘ 25주년 기사, 2011.4.20.
(14) New York Daily News, 2009.4.4.
(15) Hangtime - Bob Greene, 1994
(16) 기자 서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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